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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은행은 실패작 … 웨일 “해체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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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샌디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은 메가뱅크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25일 “메가뱅크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해 월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진은 2006년 4월 18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씨티그룹의 주주총회를 마치고 나오는 웨일의 모습. [뉴욕 AP=연합뉴스]

“거대 은행을 쪼개라. 투자은행(IB)과 상업은행은 떼놔야 한다.”

 월가 개혁을 요구해 온 시민단체의 주장이 아니다. 1998년 트래블러스 보험그룹과 씨티코프의 합병을 이끌어내 미국 월가에 ‘메가뱅크’ 시대를 연 주인공 샌디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의 말이다. 25일(현지시간) 미국 CN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나온 웨일의 ‘폭탄 발언’에 월가가 술렁거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재분리를 주장해 온 월가 개혁론자들은 반색했다. 월가의 대형 은행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 됐다.

 98년 이전까지 미국에선 상업은행이 투자은행 업무를 취급할 수 없었다. 투자은행이란 회사 돈으로 증권을 직접 인수·거래할 수 있는 금융회사로 한국의 증권회사와 엇비슷하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증권투자에 열을 올렸던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미국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자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히 격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이 제정됐다. 공룡 금융그룹이었던 JP모건에서 투자은행 부문을 떼어내 모건스탠리를 만든 게 이때다.

 그러나 80년대 미국이 세계 금융산업의 패권을 거머쥐면서 글래스-스티걸법은 월가 금융회사를 옥죄는 족쇄가 됐다. 이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게 바로 트래블러스 그룹의 최고경영자(CEO) 웨일이었다. 그는 당시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에 이어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설득했다. 맹렬한 로비로 의회도 자기편으로 만들어 98년 씨티그룹을 탄생시켰다. 웨일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월가에서 가장 화려한 생활을 보낸 그는 속세를 떠나려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잇따라 맨해튼의 재산을 팔아치웠다. 맨해튼의 호화 아파트는 8800만 달러에 팔고 요트도 5960만 달러에 내놓았다. 대신 캘리포니아주 소노마 카운티에 포도농장을 사들였다. 소노마 카운티 주립대학에 콘서트홀을 만드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웨일은 한때 씨티그룹의 전설이었다. 트래블러스 보험그룹 출신으로 씨티코프를 인수해 세계 최대 금융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나 99년 후계자 선정을 놓고 실수했다. 자신의 자리를 일찌감치 넘본 현 JP모건 회장 제이미 다이먼을 잘라냈다. 대신 찰스 프린스를 CEO로 앉혔다. 하지만 프린스는 조급했고 능력도 달렸다. 씨티그룹 CEO로서 뭔가 성과를 보여주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웨일은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웨일은 씨티그룹의 경영에 참여해 과거의 영화를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후계자 프린스가 이를 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씨티그룹에서 웨일의 ‘장학생’이었던 다이먼 현 JP모건 회장은 웨일과 정반대 입장이다. ‘대마불사’의 원칙을 강조하는 건 좋지만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업무를 기계적으로 가르는 건 미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게 다이먼의 주장이다.

메가뱅크(Mega Bank) 초대형 금융그룹. 일반 은행 업무 외에도 증권중개·투자은행·보험·상품투자 등 현대 금융 비즈니스 전 부문을 다 하기 때문에 금융 수퍼마켓이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씨티그룹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불안하게 하는 주범 중 하나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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