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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고객 무서운 줄 모르는 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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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25일 서울 남대문로 신한은행 영업점에서 만난 장모(52)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지금은 여의도에서 식료품점을 한다. 고졸과 대졸을 차별해 금리를 매긴 신한은행 얘기를 꺼냈더니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고졸은 돈 빌리면 떼어먹기라도 합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대화 중 그가 쥔 번호표 숫자가 전광판에 떴다. 화를 내던 그는 잠자코 창구로 갔다. 그러고는 거래 통장에 연결된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거래 은행을 바꿀 수는 없잖아요. 자동이체 연결된 것도 수십 개고, 이 계좌로 송금하는 거래처도 많은데….” 체크카드를 쥐고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원이 시중은행의 부당한 대출 심사 관행을 지적한 지 사흘. 시중 은행 영업점은 아무 일 없는 듯 평화롭다. 학력 차별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신한은행의 남대문로 영업점은 25일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 은행뿐 아니다. 대출이 많다고 가산금리를 더 매긴 은행, 5일만 연체돼도 대출금리를 올린 은행, 심지어 대출 계약서의 고객 서명을 위조한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발표로 영업에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없다”고 은행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그래서일까. 차별·바가지 영업 파문에 전국이 떠들썩했지만 은행권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사과문은 물론이고 흔한 해명자료를 내는 은행도 없다. 작은 이물질 하나만 나와도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 해명하고 고개를 숙이는 식품업계나 불량 하나만 발견돼도 전량 리콜을 발표하는 제조업체와는 딴판이다.

 은행들의 배짱에는 이유가 있다. “어떻게 해도 고객이 이탈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선 은행을 바꾸면 당장 불편해진다. 주거래 은행을 바꾸면 그동안 쌓아놓은 우대금리 등 혜택이 없어진다. 대출을 옮기자니 상환 수수료에 신규 심사까지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급여 통장 하나 바꾸면 수십 건의 자동이체를 일일이 새로 등록해야 한다. 이날 영업점에서 만난 또 다른 고객 한순석(51·자영업)씨 말마따나 “짜증나고 치사하지만 옮길 엄두가 안 나 그냥 쓴다”는 것이다.

 통장 옮기기가 너무 번거로워 은행이 싫어도 참고 이용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 이를 알고 고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행.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도 방치한 금융당국. 이런 구조에선 애초 은행의 자성과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금융당국이 나서야 한다. 서비스가 맘에 안 들면 다른 은행으로 쉽게 옮길 수 있도록 ‘은행 선택권’부터 고객에게 돌려줘야 한다. 고객 무서운 줄 알아야 은행도 달라질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