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렉이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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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이자 하프시코디스트, 클라비코디스트,오르가니스트, 지휘자, 음악학자인 로잘린 투렉(Rosalyn Tureck)은 생애를 통틀어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을 모두 여섯 번 녹음했다.

그중 다섯 번은 피아노로, 한 번은 하프시코드로였는데 최근 소니 뮤직에서는그녀가 1979년 하프시코드로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LP 음반을 리마스터링해두 장짜리 CD로 내놓았다.

대부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이 한 장짜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음반을 집어드는 애호가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곧 놀라게 될 것이다. 투렉은 무려 83분에 걸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글렌 굴드가 23살 때인 1955년에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의 러닝타임이 38분이었음을 감안할 때 투렉이 어떤 템포로 이 곡을 연주했는지를 짐작할 수있다.

투렉은 매우 느린 템포로 곡 전체를 끌고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다 카포(da capo)와 달 세뇨(dal segno) 등 도돌이표가 붙은 반복지시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연주하고 있다.

투렉 하면 평생을 바흐 연구에 바친 '바흐 전문가'로 유명한데 그녀가 녹음한여섯 번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역시 젊은 시절의 굴드를 포함한 많은 후배 연주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투렉의 연주를 듣고 바흐 음악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는 굴드가 정작연주는 전혀 다르게 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익센트릭(eccentric)'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굴드의 연주에 비해 투렉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는 한 마디로 유유자적하고 장식적이다. 마치 루벤스의 회화에 등장하는 나체 여인들의 풍만하고 관능적인 자태를 연상시킬 만큼 바로크풍이다.

그녀의 레가토(legato)는 딸기크림처럼 부드러우며 다채로운 모르덴트(Mordent)와 프랄트릴러(Pralltriller)는 6월의 장미처럼 화사하다.

하지만 굴드나 가브릴로프의 연주와 비교해 보면 어딘지 좀 '낡은 듯한' 냄새를풍긴다. 마치 1950년대의 기록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투렉의 악센트는 굴드의 그것처럼 폐부를 찌르는 천재성이 엿보이지 않으며 리듬은 입체적인 생동감이 부족하다. 완급 사이의 강렬한 대비도 찾기 힘들다.

평생을 바흐 연구에 헌신한 그녀의 업적이 아니었더라면 굴드 등의 연주보다는한 단계 떨어지는 '2류 연주'로 폄하될 위험도 있을 법하지만 투렉의 연주는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정말로 이 음악이 일설처럼 수면용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확실하다면 찌릿한 감동이 심장을 흥분시키는 굴드의 연주보다는 편안하게 틀어놓고 잠을 청할 수 있는투렉의 연주가 창작 의도에 훨씬 근접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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