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바닷길 5만㎞ 누빈 정화 떠올리며 양쯔강 건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0호 24면

1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양쯔강을 자전거로 건너는 날 비가 내렸다. 양쯔강은 해발 5042m의 청장고원에서 발원해 6211.3㎞의 물길로 11개 성을 적신 뒤 황해로 들어간다. 전망이 흐린 탓에 양쯔강은 더 장대해 보였다. 2 1968년에 건설된 난징의 장강대교. 양쯔강에서 건설된 두 번째 다리이자 중국의 자체 기술과 철강으로 지은 최초의 다리다. 3 중국의 소수민족 투자(土家)족이 먹는 장샹빙(醬香餠). 20여 가지 양념에 특유의 간장소스로 간을 한 부침개다. 내 입맛에는 피자보다 낫다. 4 해질 무렵 장쑤성에 이어 이번 자전거 여행에서 거치는 두 번째 성(省)인 안후이성으로 들어간다. 유럽으로 치면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번 ‘만리장정’에서 참배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중국 최고의 탐험가 정화(鄭和)다. 15세기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일곱 차례에 걸쳐 5만㎞ 넘게 지구를 탐험했다. 인류의 달 착륙에 비견되는 무동력 시대의 위대한 성취다. 자전거로 4200㎞를 탐험하는 내 여정은 초라하지만 진취적 기백만큼은 그를 닮고 싶다. 더욱이 오늘은 ‘만리장정’ 연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이정표를 찍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양쯔강을 자전거로 건넌다. 난징 시내에 있는 정화공원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⑬난징 정화공원~안후이성

정화는 현대에 들어와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인물이다. 여기저기 동상이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섬과 도시, 함선이 생겨난다. 난징의 정화공원도 예전에는 없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불타버린 그의 집터에 태평공원이 있었다가 그의 하서양(下西洋) 58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정화공원으로 개칭됐고 6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현재의 넓이로 확장됐다.

21세기 들어와서 정화는 세계적 조명을 받는다. 영국 잠수함 함장 출신 개빈 멘지스가 2002년 펴낸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는 책이 계기였다. 1488년 디아스의 아프리카 희망봉 발견,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1519∼1521)보다 앞서 제작된 15세기 초 세계지도에서 희망봉과 아메리카 대륙, 마젤란해협을 보고 멘지스는 의문을 품었다. 그들 이전에 누군가 세계를 돌았어야 그런 지도가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시작한 탐구는 당시 항해기술과 경제력에 비춰 볼 때 중국밖에 없다는 추론으로 이어지고 정화함대를 추적하게 된다.

멘지스는 당시 중국선단은 가로 돛이어서 바람과 해류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인도양에서 대서양, 그리고 태평양으로 흐르는 해류를 따라가면서 난파선의 흔적과 정박지로 추측되는 곳의 돌탑 등 방대한 정황 증거들을 찾아낸다. 그 결과 정화함대는 여러 선단으로 나뉘어 남·북극과 호주를 포함한 전 세계를 돌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5 난징 정화공원에 세워진 정화 동상.

재미있는 점은 그가 근거로 삼은 지도 중 조선시대 이희가 그린 강리도가 있다는 것.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정식 명칭인 이 지도는 중국의 지도를 보고 조선과 일본을 추가해 편집한 것이다. 원본은 없고 15세기 후반의 필사본만 일본 류코쿠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강리도에는 세계지도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가 나온다. 비록 아프리카 대륙이 유쾌하게도(?) 한반도보다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긴 하지만, 아랫부분이 팽이처럼 뾰족해 희망봉은 제대로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멘지스는 경도의 오차를 수정한 결과 아프리카 해안선이 정확히 재현된다면서 정화함대가 희망봉을 돈 증거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리도는 정화함대의 1차 원정(1405년)보다 빠른 1402년에 제작됐다. 멘지스는 1420년대 이 지도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면서 이 문제를 피해나갔다.

공원에 딸려 있는 기념관에는 7차 원정을 떠날 무렵 정화 스스로 세운 천비지신령응기(天妃之神靈應記)의 비문 탁본이 전시돼 있다. 탁본에는 여섯 차례 항해에서 다닌 국가들을 열거해놨는데 모두 인도양 변에 있는 국가다. 그가 ‘황제의 은덕을 만천하에 알린’ 항해의 성과를 축소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내 생각에 멘지스의 공로는 정화함대의 세계일주를 입증한 것보다는 유럽인 위주였던 지리상의 발견을 부정한 데 있는 것 같다. 정화함대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누군가 그들 이전에 희망봉과 아메리카를 다녀간 흔적이 있다.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땅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백인 위주의 발상이다.

어쨌든 중국의 화려한 외출은 정화함대 이후 금지된다. 영락제에 이어 등극한 홍희제는 재정파탄을 우려해 해외원행을 금했고 항해기록을 모두 파기하라고 했다. 이 해금조치가 청대에도 이어져 고립과 해양세력의 침입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결과론적 비판 같다. 정화는 1차 원정에서 200여 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을 태우고 갔다. 함대의 기선은 길이가 144m, 폭이 54m였다고 하니 축구장만 하다. 보물선(寶船)에 도자기와 비단·옥공예품을 가득 싣고 가서 조공을 맹세한 국가의 왕들에게 하사했다.

이런 경제적·문화적 격차 때문에 정화의 해외원정 자체가 ‘나가보니 별 것 없더라’는 인식을 낳고 외려 중화주의를 심화시켜 주지 않았을까 싶다. 16세기 말 중국에 있었던 마테오 리치는 견문록에서 중국인들은 속국에 사신으로 가는 것조차도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죽으러 떠난 것처럼 행동했다고 썼다. 중국의 근대화 실패는 중세까지 이룬 성공의 덫이라는 말이 더 부합하는 듯하다.

정화는 윈난(雲南)성의 회족이었다. 성도 마씨였는데 나중에 정씨를 하사받았다. 마씨는 회족에서 흔한 성이다. 마호메트의 마에서 따온 것이다. 정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메카에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주원장은 윈난성을 정복하면서 회족들을 죽이거나 아이들을 거세해 데려갔다. 11세의 정화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평생 거세당한 음경과 불알 두 쪽을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항해인 1433년 인도의 캘리컷에서 62세에 눈을 감았다.

“대양을 바라보니 큰 파도는 하늘에 닿았고 거대한 물결은 산처럼 높으나 연무 속에서 오랑캐 땅이 아스라이 보인다. 이에 우리는 구름 같은 돛을 높이 펼치고 밤낮을 유성처럼 달려 광란의 파도를 건너가는데 마치 큰 길을 걷는 것과 같도다(觀夫海洋 洪濤接天 巨浪如山 視諸夷域 <8FE5>隔于烟霞<7E39><7DF2>之間. 而我之云帆高張 晝夜星馳 涉彼狂瀾 若履通衢).” 천비지신령응기에 새겨넣은 이 구절은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대담함의 표상이다. 나도 그렇게 여행을 하고 싶다. 정화공원을 떠나 한 시간쯤 북으로 페달을 밟아 장강대교에 도착했다. 대교를 만들 당시 자전거 통행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나 보다. 편도 2차선 도로에 자전거 진입이 금지돼 있다. 차도와 난간으로 격리된 인도 역시 비좁다. 비바람이 불어서 시야는 뿌옇고 보도블록이 울퉁불퉁 튀어나와서 쉽지 않은 주행인데 오토바이와 전기자전거까지 끼어들어 추월을 시도한다. 내 자전거는 가방을 네 개나 달아서 폭이 넓다. 오토바이 한 대가 뒤에서 내 자전거를 들이받았다. 튕겨져 나갔지만 다치거나 부서진 데는 없다. 황당했지만 옆으로 비켜줄 수밖에. 대교 중간에 있는 전망대는 문이 닫혀 있고 겨우 비를 가릴 수 있는 전망대 입구는 지린내에 절어 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양쯔강은 장관이었다. 한강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고 컸다. 중국에서는 남북의 분계선으로 친링산맥과 회하(淮河)를 연결하는 선을 잡고 있지만 양쯔강을 남북분계선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직접 와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양쯔강은 해발고도 5042m의 청장고원에서 발원해 6211.3㎞의 물길로 11개 성을 적신 뒤 상하이 근처에서 황해로 들어간다. 양쯔강은 지역마다 천강(川江)·협강(峽江)·형강(荊江)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양쯔강은 양저우(揚州) 하류에서 부르던 이름인데 외국인들이 부르면서 국제적으로는 강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지만 중국에서는 어디까지나 장강(長江)이다. 양쯔강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수운이 발달했고 정화함대와 같은 대형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축적했다. 지금도 한 해 물동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강이다.

하지만 빠른 동력의 시대에 들어와 양쯔강은 남북 교통의 대동맥을 끊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기차를 타고 오가려면 양쯔강에서 멈추고 페리에 기차를 실어서 건너야 했다. 1958년에야 첫 대교가 소련의 기술과 철강 지원으로 우한(武漢)에 세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세워진 다리가 바로 내가 서 있는 난징의 장강대교다. 56년에 측량을 시작했지만 흐루쇼프의 등장 이후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12년 만인 68년 완성됐다. 소련 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해버리고 나자 한 번도 이런 다리를 건설한 적 없던 중국이 온갖 지혜와 투지를 총동원했다.

강심의 암반에 교각을 박기 위해서는 수심 70~80m까지 내려가야 했으나 중국의 잠수장비로는 수심 45m까지만 내려갈 수 있었다. 나머지 30m는 혁명의 열정으로 잠수해 공사를 끝내고 나서 지구에서 38만3000㎞ 떨어진 달나라에 아폴로 11호가 착륙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뒤진 중국이 최근 유인 우주선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뒤쫓아가고 있다. 그 역사적인 경주에서 초반 선두는 정화함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양쯔강을 건너 장쑤성에 이어 안후이(安徽)성으로 들어간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