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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보수기질과 자유 지성의 충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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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호 27면

바바리아 왕실의 궁정화가를 지낸 요제프 칼 슈틸러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 초상화. 수많은 베토벤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인간에게는 태어난 목적이 있는가. 살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만 할 목표가 있는 건가. 실존주의적 상식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가 답이다. 모든 것은 우연의 결과물이며 탈근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시뮬라크르와 같은 것이 한 인간의 생애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반대의 강박을 안고 살아간다. 산다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되고 이왕 살면 잘 살아야 한다는 과제에 집착하게 된다. 또한 실체가 없는 시뮬라크르 현상과는 정반대로 허망한 생애 속에 어떤 구체적인 흔적을 남겨놓고 싶어 안달을 한다.

詩人의 음악 읽기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총론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강박을 안겨 주는 존재가 베토벤이다. 다른 모든 음악은 마치 베토벤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는 과정적 존재인양 여기는 수가 많다. 아울러 베토벤을 듣는 일은 궁극적으로 아홉 개의 교향곡, 그중에서도 3번, 5번, 6번, 9번 이렇게 네 곡을 제대로 듣는 일처럼 여긴다.

인간이 어찌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며 음악 듣기가 어찌 베토벤에 도달하는 과정일 수 있겠는가마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적론(teleology)은 중세적 신학관에 기초하고 있고 베토벤은 근대인의 표상이다. 베토벤을 목표로 삼아 듣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중세를 떠나지 못했으면서 충분히 근대인인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베토벤일까.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음반.

제러미 시프먼의 베토벤론을 읽다가 인상 깊게 정리된 두 가지 관점을 찾아냈다. 하나는 베토벤의 도덕주의, 또 하나는 베토벤 특유의 과도함의 추구다. 1816년 베토벤이 일기장에 남긴 구절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다. ‘뛰어난 인간의 주요 특징:고난과 가혹한 여건에서 견디는 힘’. 다른 곳에 베토벤은 또 이런 표현을 남겼다. ‘힘든 것은 또한 아름답고 선하고 위대하다.’ 그러니까 고난의 과정을 거쳐 빛의 환희에 도달하는 것이 베토벤에게는 훌륭한 인간의 필수적 덕성으로 다가온 셈인데 이런 생각은 위인전을 읽는 나이의 세상 모든 소년들이 한때 품는 상념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절정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제5번 ‘운명’ 교향곡이다.

과도함의 추구는 그가 살았던 공간과 시대의 영향인 듯하다. 베토벤이 살았던 오스트리아 빈의 쾌락추구적이면서 정치적으로 무기력·무감각한 분위기와 시민혁명의 열기로 들떠 있던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는 그의 내부에 혼란과 갈등을 안겨주었다. 타고난 기질적인 보수성과 자유주의에 반응하는 지성이 서로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결과물이 고전적 규칙성을 마구 파괴하면서 나타난 3번 ‘에로이카’, 6번 ‘전원’, 9번 ‘합창’ 교향곡이다. 이들 곡은 규모의 담대한 확장이 우선 두드러져 보이지만 느낌의 충실, 이상의 표출, 이야기성의 도출이라는 점에서 유례없는 작품이다.

다시 왜 베토벤인가로 돌아가 본다. 우리가 여전히 근대인이라는 사실, 근대의 속성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교차라는 사실, 베토벤 음악이 바로 고전성과 낭만성의 총체적 구현이라는 점이다. 고전은 규칙의 완성이고 이성의 추구이며 ‘지금 이 세계’를 뜻한다. 낭만은 저 어떤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여 규칙을 파괴한다. 균형과 품위를 추구하는 고전성, 열정과 관능과 개인적 자아의 확장을 의미하는 낭만성. 이 양날의 축을 겸비한 음악으로 베토벤 교향곡만큼 다채롭고 복합적이며 화려한 음악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베토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이 또 있다. 하나는 미학적 완성도, 즉 아름다움이다. 그의 미학은 왜 하이든·모차르트의 클리셰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음악적 설명으로는 조성적 측면에서 예정된 진행을 항상 배반하면서 전개된다는 점을 든다. 어쩌면 숨쉴 틈이, 편안할 여유가 없는 것이 베토벤의 선법이다. 그런데 감상경험으로 보자면 정말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가. 바로 충돌하고 분열하는 근대인의 미학적 감각에 부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측면은 그의 영웅숭배적 특성이다. 베토벤은 제3번 에로이카(영웅) 교향곡이 말하듯 위대한 인물의 출현을 몹시 갈망했다. 이 점 역시 천재적 인물의 등장으로 이끌어진 근대시기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영웅관은 근대 이전 시기의 제왕적 가치관과는 다른, 신분주의를 벗어난 개인의 확장된 자아를 의미한다. 자아의 확장. 이것은 근대인의 염원이었고 새롭게 대두되는 문물과 문화예술의 원천이기도 했다.

왜 베토벤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탈근대를 넘어 성격 규정조차 모호한 디지털 문명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누구인지 근원적인 사색을 하게 된다. 여전히 우리는 근대인이면서 동시에 중세의 망령을 떠돌고 있는 존재라는 것. 모든 각 개인들에게 오천 년 문명사 전체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 그만큼 베토벤의 교향곡은 엄청난 유산이라는 것. 구절구절마다 피나게 아프고 끔찍하게 아름다운 개인의 내면성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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