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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올림픽 D-8] ‘빛나는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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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영국의 이스트 서식스 지방에서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케이시 고어가 18일(한국시간) 영국 남부 해변인 시퍼드헤드에서 7개의 석회질 언덕이 절벽을 이룬 세븐 시스터즈를 배경으로 성화 봉송을 하고 있다. [시퍼드헤드(영국) AP=연합뉴스]
전수진 기자

#1.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 마틴 콤슨(28)에게 인생은 완벽했다. 2006년 8월 1일, 장갑차로 이동 중 탈레반에게 폭탄 공격을 받기 전까지는. 동료 3명은 즉사했고 그는 3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가까스로 깨어났지만 전신화상으로 얼굴마저 망가졌다. 거울을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약혼녀 미셸은 달랐다. 어서 결혼하자고 이끌었다. 용기를 얻어 새 삶을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참전용사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다. 새 삶은 그에게 새로운 타이틀을 선사했다. 런던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다. 17일(현지시간) 영국 남동부 서식스의 작은 해변도시 헤이스팅스에서 그는 부인 미셸과 9개월 된 아들 아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생 최고의 300m를 달렸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그는 완주 후 아들과 부인을 오래오래 포옹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런던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들. 위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다 낙하산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뇌를 다친 벤 파킨슨, 윈저궁에서 성화 봉송에 나서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난 지나 맥그리거(왼쪽 둘째)와 필 웰스(왼쪽), 영국의 전 육상스타 로저 배니스터(왼쪽)와 옥스퍼드 박사과정의 니콜라 바이롬, 골수 종양을 극복한 폴 캐번,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은 라나 포일(오른쪽)과 어머니. [로이터·AP=뉴시스, 전수진 기자]

 #2. 마라톤 없이는 못 살던 헤이스팅스 토박이 폴 캐번(70)은 1999년 골수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투병 중에도 트랙에 나가 걸으며 투지를 다졌다. 그러다 줄기세포 이식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지금까지 하프마라톤만 200회 넘게 뛰었다. 17일,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마라톤 동호회원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화를 봉송했다. 뛰진 못했다. 올봄,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이다. 오른손엔 성화, 왼손엔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었다. 그를 위해 헤이스팅스의 모든 시민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 계속 뛸 거예요. 늙고 병든 채 인생을 낭비할 순 없잖아.” 그의 소감이다.

 #3. 라나 포일(14).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꿈이다. 2년 전, 연습 중에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병원에 갔더니 심장에 작은 구멍이 있다고 했다. 심장이식수술을 받은 그는 특유의 낙천적 성격으로 “난 심장을 두 개나 받았다”며 농담하곤 했다. 어머니 루스 포일은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편지를 썼다. 성화봉송 주자로 딸을 뽑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라나 포일은 17일, 헤이스팅스 구간의 첫 번째 주자로 발걸음도 가볍게 뛰었다. 구간이 끝나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달려가 “사랑해 엄마”라고 외쳤고, 엄마는 딸을 안으며 울었다.

 런던 올림픽 성화봉송의 모토는 “당신이 빛날 순간(Your moment to shine)”이다. 17일 기자와 함께 헤이스팅스 구간을 완주한 주자는 모두 16명. 그들은 인생 최고로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을 맞았다. 봉송 시작을 앞둔 17일 오후 3시, 헤이스팅스 시청에 모인 주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글썽였다. 세라 해턴(41)은 “방수 마스카라를 하고 오길 잘했다”고 농담하며 “난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에어로빅 강사인 그는 대장염을 극복한 의지의 여인이다. 6개월간 대변 주머니를 차고도 에어로빅을 가르쳤다고 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미디어 사무국을 통해 추천받은 기자가 민망할 정도로 동료 주자들의 감동 스토리는 가슴을 울렸다.

 런던조직위 서식스 지역 성화봉송 책임자인 우나 뮤리헤드는 “지역 주민 중 500명을 뽑는데 3000명 넘게 지원했다”며 “모두의 사연이 애틋해서 선정 과정에서 울지 않은 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 올림픽의 꽃은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성화 봉송이다”라고 강조했다.

 8000명의 성화봉송 주자가 70일간 영국 전역 8000마일(1만2875㎞) 구간을 샅샅이 훑으며 올림픽을 지역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무게 800g, 길이 800㎜의 성화가 영국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다. 헤이스팅스 시민의 반응도 뜨거웠다. 성화 주자가 달리는 길가는 물론 건물 옥상·발코니를 가득 메운 이들은 본 적도 없는 낯선 주자에게 열띤 함성을 보냈다. 인류를 하나로 묶고 서로를 격려해 주는 것, 올림픽의 힘이다. 

헤이스팅스(영국)=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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