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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길 칼럼

경제민주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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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수길
주필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지금까지 120만 권 넘게 나갔다. 전 세계에서 팔린 영문판은 많아야 10만 권 정도라고 한국 측 출판사는 전한다.

 지금 대선을 앞두고는 ‘경제민주화’가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전 세계에서 올해 대선을 치르는 나라 중 경제민주화를 놓고 여야가 서로 치고 나가는 경우는 우리 말고 없다.

 유독 한국에서 출판계가 ‘정의’ 마케팅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정치판이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대선 승리를 차지하려는 것에는 분명 어떤 연관이 있다. 정의·경제민주화가 과연 2012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었는지, 한 정권에 실망한 한때의 반작용이었는지는 지내놓고 보면 알 일이다.

 정의와 경제민주화는 모두들 다 쉬이 아는 것 같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누구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샌델 교수의 강의와 저서는 “정의란 (어느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라고 요약할 수도 있다. 경제민주화는 어떨까.

 최근 진보 진영 학자들과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어려우니 구체적 사례로 풀어가자고 했다. 제시한 사례 대부분은 재벌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 첫 번째 사례가 횡령·배임에 대해 더 엄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새누리당 토론에 가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며칠 전 새누리당은 경제범죄에 실형을 살리고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도록 형량을 높이는 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선수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터이다.

 다른 자리에서 새누리당 핵심 인사 한 사람에게도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정직한 답이 돌아왔다. “아직 합의된 것 없다. 그래서 함구령이 내려져 있다.”

 박근혜 공약 첫 번째로 경제민주화를 앞세우고 법안도 발의했지만, 어디까지 무엇인가에 대한 공식 입장은 아직 없다.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1987년 경제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넣은 주인공인 김종인 선대위 공동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도 아직 ‘작업 중’이다.

 어떻든 지금까지 정치권의 논의를 보면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개혁에 있다.

 마침 우리 말고 재벌 개혁이 국가적 과제로 떠올라 있는 나라가 하나 더 있다. 이스라엘이다.

 우리보다는 덜하지만 경제력 집중이 매우 높은 이스라엘에선 지난해부터 높은 주택 임차료, 고물가, 열악한 의료·교육 시스템, 비싼 자녀양육비 등을 놓고 시위가 이어졌다. 재벌의 독과점 구조가 고물가의 한 원인이라고 본 이스라엘 내각은 강력한 재벌 개혁 조치를 입안했다. 그 위원회의 이름이 ‘경쟁력 강화 위원회’다. 재벌 개혁을 하되 그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경쟁력 강화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제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가장 익숙한 나라는 스웨덴이다. 노동자·농민 등이 주요한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는 정치민주주의를 거쳐, 복지를 바탕으로 한 사회민주주의를 이루고 난 다음, 경제적 평등과 함께 자본 이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 경제민주주의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는 스웨덴에서조차 아직 실현되지 못한 단계다. 시도는 있었으나 자본가·노동계급 모두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국제경쟁력 하락에 따른 경제 불황이 몰고 온 고물가·고실업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경제민주화·경제정의가 처음 쓰나미처럼 닥친 것은 87년 6·29 선언 직후부터였다. 모든 단어 뒤에 민주화가 따라붙은 당시의 경제 상황을 생생히 기록한 책이 6공 경제실록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저자 이장규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현 서강대 초빙교수)다. 경제가 민주화를 처음 만나서 어땠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발독재하의 관성을 탈피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민주화 세상에서 빚어졌던 갖가지 시행착오와 실패사례들이야말로 두고두고 귀중한 교훈이 될 것.”

 “정치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이라는 두 과제가 어떤 콤비네이션을 일으키는지를 한국 국민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경험했던 시기.”

 개발 독재는 이미 끝났다. 6·29 이후의 민주화를 절차적 민주화로 평가 절하하고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높은 시절, 이제 우리는 두 번째 경제민주화 쓰나미를 맞고 있다.

 경제민주화가 무엇인가는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한 가지로 말할 수 없지만 어떻든 분명히 다 함께 우리 모두를 위해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답은 없다. 우리 상황에 맞는, 우리의 선택이다.

김수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