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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검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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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업가 B씨(50)는 2010년 12월 중소기업유통센터와 비만도 등을 측정하는 체형분석기 수출대행 계약을 했다. 이 계약 덕분에 그는 센터로부터 10억원을 지원받았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중소기업에 주는 수출 지원금이었다. 하지만 B씨는 수출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지원금만 가로채고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 가짜 물건을 미국으로 수출했다. 선박운송 기간이 오래 걸려 실제 수출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이를 알아챈 센터는 B씨를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하지만 지검에선 올 2월 그를 무혐의 처분했다. B씨가 제출한 각종 증빙서류를 근거로 사기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센터는 한 달 뒤 항고했다. 서울고검 형사부는 사건을 지검으로 내려보내지 않고 직접 수사했다. 그리고 지난 4일 B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센터 관계자는 “무혐의 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심했다”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고했는데 고검에서 구속기소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고검이 달라졌다. 사건 관련자를 소환해 직접 수사하고, 구속하기도 한다. 서울고검에 따르면 최근 9개월간(지난해 10월~6월 말) 고검에서 항고 사건을 직접 수사한 비율은 48%. 지난해 1~9월(8%)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같은 기간 소환자는 139명에서 756명으로, 구속자도 1명에서 8명으로 늘었다. 그동안 고검은 고소·고발인이 일선 지검·지청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항고한 사건에 대해 대부분 기각해 왔다. 기각하지 않은 사건도 일선 지검으로 내려보내 재수사하도록 하는 게 관행이었다. 안창호 서울고검장은 “훈수 두는 역할에 그쳤던 고검이 ‘직접’ 수사에 뛰어든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변화는 지난해 9월 대검찰청에서 ‘지검으로 내려 보내는 항고 사건을 최소화하고 고검의 본령대로 직접 수사하라’는 공문을 보낸 데 따른 것이다.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고검 검사들의 직접 수사 결과를 인사에 반영하겠다”는 방침도 전달했다. 검찰 관계자는 “과거엔 고검으로 발령 나면 ‘쉬러 간다’는 분위기 있었는데 최근 고검 검사들 사이에선 ‘항고 사건 처리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사건 관계자들도 달라졌다. 정석우 서울고검 부장검사는 “‘항고한다고 해서 무혐의 처분 결과가 바뀌겠느냐’며 자포자기했던 고소·고발인들이 증거를 들고 적극적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예전엔 ‘무혐의 처분 났는데 왜 또 소환하느냐’며 떨떠름해하던 피고인들도 변호사를 선임해 적극 대응하는 등 바짝 긴장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고등검찰청=대검찰청과 지방검찰청의 중간 단계에 있는 검찰 관서. 일선 지검에서 항고한 사건을 2차 수사하거나, 형사 사건 항소심의 공소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감독·감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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