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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까지 ‘다이내믹 코리아’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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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02면

“심판은 규칙을 만들지 않고 단지 적용할 뿐입니다. 그 역할은 제한적인 것입니다. 심판을 보러 야구장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장 존 로버츠(57). 그는 2005년 9월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판사는 야구 심판과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지난달 28일 로버츠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법안(오바마 케어)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합헌 쪽에 섰다. 그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 의해 임명된 대법원장이었다. 그런데도 진영논리보다 “중대한 하자가 없는 한 의회가 만든 법률을 존중한다”는 법률가로서의 원칙을 세우는 결정을 했다.

권석천의 세상탐사

로버츠는 이번 합헌 판결에서 ‘사법 소극주의(Judicial restraint)’를 택했다. 법률을 규정 자체로 해석, 적용한다는 입장이다. 현실정치 개입을 자제하는 쪽이다. 반면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는 정의 실현을 위해 법률을 적극적으로 해석·적용하자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법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법부는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면 법의 저울이 사법 적극주의 쪽으로 기울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느냐다. 김능환 대법관은 지난 10일 퇴임식에서 헌법재판소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여러 번에 걸쳐 합헌이라고 선언했던 법률을 헌법이 바뀐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위헌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대법관은 지난 1월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헌재가 2009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인터넷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는데 2년 만인 지난해 12월 29일에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이유가 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 지적에 공감하는 법조인들이 적지 않다. 한 판사는 “임기 중에 입장을 바꾼 재판관은 변심의 이유를 결정문에 밝히는 게 맞다”고 했다. 이런 맥락이라면 헌재 재판부가 교체될 때마다 동일한 법 조항에 대한 심판을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헌재는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2002년 합헌 결정(합헌 7 대 위헌 2)을 했으나 7년 만인 2009년 위헌 결정(위헌 6 대 합헌 3)을 했다. 윤영철 전 소장이 이끌던 3기 재판부가 한 결정을 이강국 소장의 4기 재판부가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과 헌재는 요즘 최고 재판기관의 위상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여러 건의 판결·결정을 통해 선명성 경쟁을 벌인다는 인상을 준다. 대법원에선 ‘정책법원’이란 용어가 자주 쓰인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긴급조치 1호 위헌(2010년 12월), 일본 기업의 징용 피해자 배상책임 인정(지난 5월) 등 획기적인 판결들이 나왔다. 지난해 9월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뒤엔 ‘국민과의 소통’ ‘선도적 사법’이 강조된다. 폭력과 금융범죄 등 이른바 반(反)사회적 범죄자에 대해선 엄정한 양형(형량 결정)을 하겠다는 자세다. 최근 법원은 검찰 구형량보다 높은 중형을 잇따라 선고하고 있다.

헌재와 대법원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법치주의의 기반인 법적 안정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만든 법률에 대해 위헌 여부를 결정할 때는 장기적 안목을 갖고 임해야 한다. 헌재 소장이 바뀔 때마다 결론이 달라지거나 같은 재판부에서 두 개의 정답이 나와서는 곤란하다. 헌법적 잣대가 오락가락하면 국민이 안심하고 살기 어렵다.

‘선도적 사법’은 국민 법 감정과 동떨어진 형량을 선고하던 관성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일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만 실제 적용 땐 신중해야 한다. 법원도 사회 요구를 반영해야 하지만 개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놓쳐선 안 된다. 범죄에 대한 엄벌의 필요성이 강조될수록 억울한 피고인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사법 적극주의의 역할은 존재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얼 워런 대법원장 시절(1953~69년) 인종분리교육 철폐 등의 판결로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때로는 대법원 판결 하나, 헌재 결정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함께 확보해 나가야 한다. 법까지 ‘다이내믹 코리아’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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