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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쿵푸열풍 일으킨 한국감독 "전두환 때 난도질 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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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11회 뉴욕아시안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정창화 감독. 오른쪽은 1972년 그가 만든 ‘죽음의 다섯 손가락’ 한 장면이다.

한국 영화의 ‘대부’ 정창화(84) 감독이 제11회 뉴욕아시안영화제(NYAFF·6월 29일~7월 15일)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정 감독은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으로 미국에 쿵푸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펄프픽션(Pulp Fiction)’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 ‘킬 빌(Kill Bill)’에서 정 감독을 향한 오마주(Hommage·선배 영화인의 업적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감명 깊은 대사나 장면을 본뜨는 것)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나왔던 장면을 재연하고 음악도 같은 것을 사용했다.

 ‘한국 액션 영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정 감독을 최근 뉴욕 맨해튼 키타노 호텔에서 만났다.

 - 지난해 서극 감독 등 주로 홍콩 감독들이 수상했고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서극 감독이 영화계에서는 아주 후배죠. 홍콩에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에요. 저 같은 경우 외국인이면서도 홍콩으로 스카우트 돼서 작품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려 노력했고, 제 나름대로 홍콩 영화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영화 전반에 제가 기여한 게 있다고 인정한 것 같습니다.”

 홍콩에서 만든 정 감독의 작품은 대히트였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당시 미국의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홍콩에서 활동하던 정 감독은 70년대 후반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해줬으면 좋겠다”고 초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제작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후배들과 제작에 공을 들였다. 1년 반 체류했을 때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작한 영화 29편이 검열에서 10~20분씩 난도질을 당하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부인이 미국 투자이민을 신청한 것이다.

 - 영화계를 떠나 있었는데.

 “돌아보지 않았어요. 너무 많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영화관도 안 가고, 한 10여 년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거절하다 임권택 감독이 간곡히 요청해 받아들였죠. 그해 10월에 회고전을 했죠. 그러곤 영화와의 관계가 제 자리로 돌아온 거에요.”

그는 이후 한국 영화인들과 교류해가며 우리 영화계의 원로 역할을 해왔다.

 - 최근 기억에 남는 한국 영화는요.

 “‘완득이’ 같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우리 생활에 와 닿는 이야기죠. 젊은이하고 어른 사이의 대화, 다민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국 영화를 지켜봤을 텐데, 경쟁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한국인의 끈기, 근성이에요. 아시아권에서 한국 영화가 정상에 올라가 있는 이유입니다.”

 - 한국 영화 ‘글로벌화’ 테이프를 끊었는데, 우리 영화의 방향에 대해 말씀한다면.

 “후배들에게 이야기해온 게 있습니다. 한국 영화 시장은 좁다.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결국 글로벌로 이어집니다. 이젠 달성했죠. 남이 하는 것, 흔히 있는 이야기로 하면 절대 성공을 못 해요. 우리 영화인들이 도전하면 한국 영화는 더 발전합니다. 확신하죠.”

뉴욕 중앙일보=이주사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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