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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맹약하고 폭력으로 조선혁명 완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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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호 26면

관동대지진 때의 계엄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를 암살하려 했던 사건의 공판 결과가 실린 1925년 동아일보의 지면이다. 한국 여성과 일본 아나키스트가 연계된 사건이다. [사진가 권태균]

1923년 9월의 도쿄대지진, 곧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계엄사령관은 군부 실력자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郞·1866~1932) 대장이었다. 일본 극우파는 대지진 때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재일 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그중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衫榮)와 동지 이토 노에(伊藤野枝) 및 일곱 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橘宗一)를 죽여 시신을 우물에 던지는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을 일으켜 큰 충격을 주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 사회주의 단체 조직 참조).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③민족을 초월한 한·일 연대

저명한 사상가 오스기 사카에가 처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은 큰 물의를 일으켰고 후쿠다는 계엄사령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 아나키스트 와다 규타로(和田久太<90CE>·1893~1928) 등이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던 9월 1일 전 계엄사령관 후쿠다를 저격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1924. 9.2~5) 등에 따르면 와다 규타로는 오스기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비록 후쿠다의 목숨을 끊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본 극우파의 무차별 테러행위에 대한 응징이란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와다 규타로는 기로틴(ギロチン)사의 나카하마 데쓰(中浜哲)·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90CE>) 등과 손잡고 후쿠다 저격에 나선 것이었다. 나카하마 데쓰는 1922년 8월 ‘자유노동자동맹’을 결성하고 박열과도 만나서 니가타 현에서 발생했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을 함께 조사했던 아나키스트였다. 단두대를 조직 명칭으로 삼은 기로틴사는 22년 결성된 직접 행동조직이었는데, 나카야마 데쓰가 박열의 동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무렵 한인과 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은 서로 동지였다.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석방된 서동성(徐東星)은 25년 9월 대구에서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는데 진우연맹은 기로틴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단체인 진우연맹 관련 기사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이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대구로 함께 호송됐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要史)는 25년 11월 진우연맹이 방한상(方漢相)을 오사카·나고야·도쿄 등에 몰래 보내 일본의 자아인사(自我人社)·자연아연맹(自然兒聯盟)·기로틴단(團)등과 교섭했다고 전하는데, 기로틴단이 바로 기로틴사를 뜻한다. 기로틴사는 학살자였던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도 습격하고 후쿠다 자택에도 폭탄을 보내는 등 계속 응징에 나서 일경이 대대적인 수사를 전개하는데 그 와중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함북 명천(明川) 경찰서 고등계는 한인 여성 김선희(金善姬)와 전정화(全鼎花)를 체포하는데 기로틴사의 후루타와 그 동지 타카시마(高島三次)와 접촉한 혐의였다.

25년 12월 청진 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따르면 후루타와 다카시마는 23년 서울 견지동에서 전정화를 만나 권총과 폭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정화는 후루타와 다카시마를 김선희에게 소개하는데, 간도 출신의 김선희는 남편 황돈(黃敦)이 제령 위반으로 징역 8년의 중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으며, 그 부친은 간도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살해당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때 후루타 등이 요구한 것은 의열단의 폭탄 10개와 권총 5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무기 구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희와 전정화는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일본 아나키스트들도 박열 못지않은 탄압을 받아 24년 9월 체포된 기로틴사의 나카하마 데쓰는 이듬해 5월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었고 후루타 다이지로는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26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이처럼 일본인 아나키스트도 사형시키는 판국이니 이들과 연결된 국내의 진우연맹이 무사할 리 없었다. 일경은 26년 8월 11명의 진우연맹원들을 검속했다.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보통 1년 이상 구속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면서 신문받았는데, 이 기간은 판결 때 구속 일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동아일보 27년 2월 28일자는 “진우연맹원들이 대구형무소 벽을 두드리면서 ‘구속 1년이 넘은 현재까지 예심도 종결하지 않고 가족 면회도 시키지 않는다’면서 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때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단식투쟁은 묻혀 버리기 일쑤였지만 진우연맹원들의 단식투쟁은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일제는 부랴부랴 재판을 진행해 3월 8일 예심을 종결했다. 방한상·신재모(申宰模) 등 9명의 한인들과 도쿄에서 압송당한 구리하라(栗原一郞) 등 2명의 일본인들이 피고였다. 27년 5월 대구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는 수백 명의 방청객이 쇄도했는데 용수가 벗겨지자 연맹원들은 서로 악수하면서 방약무인한 태도를 지었다고 전한다. 야마자와(山澤) 검사의 방청 금지 요청을 가네다(金田) 재판장이 받아들이자 구리하라가 “공개 금지 이유를 말하라”면서 재판장을 크게 꾸짖어 소동이 벌어졌다. 기자도 내쫓고 피고 가족 10여 명만 입석시킨 채 재판이 속개되자 변호사들이 항의 퇴정했다.

일제가 재판을 비공개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진우연맹원들의 혐의 때문이었다. 이들의 혐의는 ‘대구 부내의 관청과 회사·은행·우편국·신문사 등을 폭파하려는 음모’였다. 대구 지방법원장과 대구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언도공판에서 김정근(金正根)과 구리하라 등은 징역 10년, 방한상·신재모 등은 징역 5년 등이 구형되었는데 피고들이 재판장에게 노호(怒號)해서 주위가 크게 소란했다고 전하고 있다.

26년 새해 벽두인 1월 4일에 서울 시내 곳곳에 허무당(虛無黨) 선언이란 인쇄물이 배포돼 일경에 비상이 걸렸다. 신문은 “시내 각 경찰서에서 비상하게 놀라서 각 서 고등계가 서로 연락하면서 대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동아일보(1926년 1월 8일)는 “허무당 선언에 관한 기사는 당국이 일체 게재를 금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경은 1월 12일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 윤우열(尹又烈)을 체포하는데 신문은 ‘모 중대사건’이라고만 표현해야 했다. 훗날 밝혀진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박해하는 포악한 적에게 선전을 포고하자!”며 “우리가 부인하는 현세의 이 흉포악독하기가 사갈(蛇蝎·뱀과 전갈) 같은 정치, 법률 및 일체의 권력을 근본으로부터 파괴하자!”라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가 허무당 선언에 겁을 먹은 것은 “이 전율할 광경을 파괴하는 방법은 직접행동이 있을 뿐인데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라고 직접행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과 폭탄으로 일제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직접행동’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혁명 노선이었다. 허무당 선언은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능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맹약하고 폭력으로써 조선혁명의 완수를 기하고자 허무당을 조직한다”고 주장했다.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착취하고 학대하고 살육하는 포악한 적에 대해 복수의 투쟁을 개시하자! …포악한 적의 학대에 신음하는 민중들이여, 허무당의 깃발 아래 모이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허무당 만세! 조선 혁명 만세!”로 끝맺고 있다.

이처럼 직접 혁명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동향을 일제가 주시하는 와중에서도 27년 평안도 지역에서는 관서흑우회가 만들어지고 29년 11월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출범했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평양의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白善行) 기념관’에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일제가 집회를 불허하자 평남 대동군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 전격적으로 모여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이 평양으로 집결하자 일경은 역과 여관 등지를 대대적으로 검문해 타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하거나 평양 밖으로 추방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일제의 그물 같은 경찰망 때문에 활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마자 와해되는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국외에 근거지를 둔 채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는데 그런 대표적인 조직이 19년 11월 10일 길림 파호문(巴虎門) 반씨객점(潘氏客店)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이었다. 동아일보 23년 4월 20일자는 “지난 19일 아침에 경기도 경찰부를 위시해서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빛을 띄우고 각 기관 내를 엄중히 경계하는 동시에 모 중대 범인의 자취를 엄중히 추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의열단원 한 명이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했다는 정보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듯이 의열단은 일제에 공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