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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저금리 시대 '할부 인생' 는다

중앙일보

입력

금리가 연 5~6%로 낮아지면서 저금리 상황이 생활을 서서히 바꾸고 있다.

여유 자금을 은행에 맡긴 채 이자소득으로 살던 사람들이 부업이나 창업 전선에 뛰어들고, 충분하진 않지만 고정적인 수입을 안겨주는 직장생활에 만족하는 사회 분위기도 자리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저금리 상황이 이어지면서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 우는 현금부자, 웃는 샐러리맨〓경기도 용인 지산골프장 관계자는 "흰눈이 녹으면서 흰머리가 사라졌다" 고 말했다. 지난해 평일 골프장 손님의 30%를 차지했던 노인 골퍼를 올 들어선 찾아보기 어렵다.

골프장측은 "퇴직금을 금융기관에 맡긴 채 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던 노인들이 저금리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고 분석했다.

대기업인 C사 인사담당 임원은 "요즘 직원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고 말했다. 이달부터 출근시간을 오전 8시30분으로 30분 앞당겼는데 지각하는 직원이 거의 없다는 것.

이 임원은 "직원들이 외환위기 이후 한때 흔들렸는데 벤처 열기가 시들하고 금리가 낮아지자 소득이 안정된 직장생활에 애착을 갖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

◇ 할부인생 부담 줄어〓회사원 崔모(35)씨는 30평형대 아파트를 살까 고민하고 있다. 8천만원이 부족해 좀더 저축한 뒤 사려다가 대출금리 인하 소식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일부 은행의 변동금리는 연 7.5%까지 낮아져 30년 장기대출을 받을 경우 매달 56만원의 할부금을 내면 된다. 崔씨는 "금리가 오르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무리해서라도 내집 마련을 앞당길까 생각한다" 고 말했다.

새내기 직장인 河모(30)씨는 최근 자동차를 구입했다. 보증인도 필요없고 금리도 연 10%로 할부금융보다 낮아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자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은 은행들이 낮은 금리로 대출 세일에 나서자 봉급생활자들도 생각을 바꾸고 있다. 저축으로 목돈을 만들기보다 일단 싼 금리로 대출받아 주택이나 자동차를 구입한 뒤 할부로 갚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웰시아닷컴 문순민 본부장은 "장기저리 상품이 자리를 잡으면 젊은층을 중심으로 수입의 대부분을 연금과 할부금에 쓰는 선진국형 소비 패턴이 정착할 것" 이라고 내다봤다.

◇ 주부 재취업.퇴직자 창업 늘어〓퇴직금에 대한 이자가 줄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주부들이 나서고 있다. 퇴직한 중년 남성의 재취업이 어렵자 가사.육아 등 임시직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주부들이 일자리를 찾아나선 것이다.

지난해 남편이 직장을 잃은 주부 李모(45)씨는 최근 미용실에 취업했다. 은행에 맡긴 퇴직금 1억원에서 나오는 이자로 생활하다 젊을 때 배워둔 미용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지난해 초 기업체 부장에서 퇴직한 朴모(54)씨는 친구 두명과 2억원을 투자해 편의점을 차렸다. 朴씨는 "퇴직금과 저축 등 2억5천만원을 은행에 예치한 채 이자로 생활했는데 금리 하락으로 자녀 학비 대기가 힘들어 창업을 결심했다" 고 말했다.

◇ 금리에 민감〓한국은행은 올 초 퇴직금을 조기 정산해 7백50억원을 지급했다. 이 중 4백억원이 일주일 만에 두 개 상호신용금고로 몰렸다. 한 금고는 연 10.2%의 확정 금리를 약속했다.

지난 16일 판매를 시작한 국민은행의 부동산투자신탁 5호 펀드는 2분도 안돼 4백억원 한도를 채웠다. 예상 수익률(연 7.8%)이 시중금리보다 2%포인트 가까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철호.서경호.최현철.하재식 기자news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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