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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우승 이끈 이니에스타, 얼핏 보면 동네축구 아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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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니에스타가 이탈리아와의 유로2012 결승전을 앞두고 헤딩 훈련을 하고 있다. 이니에스타는 유로2012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키예프 로이터=뉴시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6월은 뜨거웠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로 밤새 축제가 이어졌다. 2억5000만 명의 축구팬이 결승전을 TV로 지켜봤다. 골이 터질 때마다 웃고 울었다. 스페인은 유로 2008과 2010 남아공월드컵에 이어 3회 연속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조별리그 3연패로 충격의 탈락을 경험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유로 2012는 세 남자를 위한 대회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7·포르투갈), 마리오 발로텔리(22·이탈리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28·스페인). 한국 축구팬들도 이 세 남자의 활약을 보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각자 다른 매력으로 축구팬을 매료시킨 이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이니에스타-작은 거인의 탄생

 프로필에 나온 키는 1m70㎝다. 실제로 보면 1m65㎝ 이하다. 하얀 얼굴에 근육도 별로 없는 몸매는 축구선수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말투는 나긋나긋해 박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훈련장으로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기축구 아저씨다.

 하지만 이 작은 선수가 유로 2012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6경기 1도움에 불과하지만 기록을 뛰어넘는 활약이 있었다. 이니에스타는 스페인 미드필드의 핵심이다.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며 상대를 압박한다. 현장에서 결승전을 지켜본 최강희 축구대표팀 감독도 “이니에스타가 스페인 우승을 이끌었다. TV에서 보는 것보다 2~3배 더 뛴다. 이니에스타의 장점은 패스보다 압박이다. 덩치 큰 선수들을 밀어붙이는 걸 보면 신기할 뿐”이라고 칭찬했다.

 이니에스타는 희생을 아는 선수다. 슛보다는 패스로, 공격보다는 수비로 동료를 도와 팀을 승리로 이끈다. 경기장 곳곳을 누비는 모습이 마치 꽃을 쫓아다니는 벌과 같다. 기술까지 좋아 상대팀 입장에선 눈엣가시다. 수비수 2~3명이 달라붙어도 깔끔한 개인기로 제쳐낸다. 메시와 사비 에르난데스를 합쳐놓은 듯한 선수다.

 또 100억원의 연봉을 받는 스타지만 허름한 티셔츠 한 장에 반바지를 즐겨 입는다. 스포츠카, 여자와도 거리가 멀다. 축구 외 생활은 오직 재테크뿐이다. 여의도 면적보다 3배 넓은 포도밭을 사 와인을 생산하는 게 그의 두 번째 직업이다. 스페인 와인시장 점유율 2위에 오를 정도로 사업도 잘된다.

 이니에스타는 유로 2012 MVP로 그동안 숨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최고 선수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니에스타는 “내 MVP보다 스페인이 우승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호날두-울보에서 어른으로

자신이 운영 중인 양조장에서 와인을 살펴보고 있는 이니에스타. [중앙포토]

 호날두는 포르투갈의 작은 섬 산투안토니우에서 태어났다. 지독한 가난에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때문에 열여섯 살 때 프로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다. 다혈질 성격에 눈물도 많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스스로 화를 못 이겨 경기를 망쳤다. 유로 2004 결승에선 그리스에 패한 뒤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호날두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른이 다 됐다. 유로 2012에서는 주장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소화하며 포르투갈을 4강으로 이끌었다. 스페인과의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좌절했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승부차기는 복권 당첨과 같다. 포르투갈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매 경기 냉정함을 유지했다. 슛이 빗나가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수비 진영으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실수하면 박수를 보내며 독려했다.

 대회 내내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뛰어난 축구 실력뿐 아니라 외모와 입담까지 신경 쓰는 세밀함을 보여줬다. 호날두는 전반과 후반 헤어스타일이 다르다.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정리하며 가르마 방향을 바꾼다. 포르투갈 대표팀 트레이너는 “호날두만의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골을 넣고서는 서비스를 확실하게 했다. 방송 카메라를 향해 키스를 날리고 두 살짜리 아들에게 ‘죔죔’하는 애정표현도 했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는 이기든 지든 늘 침착했다. 언론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라이벌 리오넬 메시(25·아르헨티나) 이야기가 나오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메시도 1년 전 코파 아메리카에서 실패했다. 누구든지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 독일전에서 0-1로 진 뒤에도 “이 경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음 경기를 기대하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호날두의 파급력은 경기장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곳까지 호날두를 쫓아가 보면 그가 상대팀에 얼마나 공포의 대상인지 안다. 우승팀 스페인도 준결승에서 호날두 한 명에 모든 수비가 집중됐다. 수비수 2명과 미드필더 2명이 호날두를 겹겹이 둘러싸 이동 범위를 좁혔다. 관중들도 호날두가 공을 잡기만 기다렸다가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쏟아냈다. 사진기자도 호날두가 포진해 있는 쪽에 가장 많이 몰렸다.

 호날두도 자신이 대회 최고 스타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말 한 마디가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는지도 안다. 대회 기간 자신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포르투갈 대표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동료들은 어른스러워진 호날두에게 신뢰를 보냈다. 인터뷰에서 호날두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은 대답을 한다. “호날두는 내 친구이자 세계 최고 선수다. 메시와 비교하는 질문 자체가 불쾌하다”며 호날두 편을 들었다.

 발로텔리-스승 잘 만나 개과천선

 발로텔리는 고집이 세다. 아니다 싶으면 단번에 등을 돌린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말도 섞지 않는다. 인종차별에 대한 피해의식도 강해 대회 직전에는 “나에게 바나나를 던지면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아 이탈리아 가정으로 입양 온 게 아직까지도 마음의 상처다. 그래서 툭하면 동료와 싸우고 말썽을 부린다.

 하지만 유로 2012에 ‘악동’ 발로텔리는 없었다. ‘악동’보다는 ‘열정’으로 느껴졌다. 발로텔리는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 유니폼 상의를 벗어 근육을 자랑하는 ‘헐크 세리머니’를 했다. 평소 골을 넣고도 절대 기뻐하지 않았던 모습과 정반대다.

 양어머니 실비아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발로텔리는 어릴 때부터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비난할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유로 2012에서는 팬들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세리머니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아들은 이유 없이 혼을 내면 입을 닫아버리는 성격이다. 유로 2012에서 동료와 잘 지내며 골까지 넣은 건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님 덕분이다. 발로텔리를 이해해주고 감싸줬다. 대회가 끝나면 꼭 감사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란델리는 발로텔리를 끝까지 믿었다. 늘 아버지처럼 다독이며 응원했다. 발로텔리에 대해서도 “평범한 20대 초반 청년이다. 그는 단지 실력이 뛰어난 축구선수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발로텔리는 프란델리의 지시를 잘 따랐다. 준결승에서 넣은 첫 골을 프란델리에게 바친다는 인터뷰까지 했다. 발로텔리는 프란델리를 위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경기 중에 흥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기 내내 노력했다. 경기 도중 구석으로 가 혼자 화를 내거나 애꿎은 잔디를 쥐어뜯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훈련장에서는 누구보다도 선수들과 잘 어울렸다. 라이벌 공격수 안토니오 디나탈레·안토니오 카사노와 함께 다니며 밝은 훈련 분위기를 주도했다.

 발로텔리는 스페인과의 결승에서 0-4로 패하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기든 지든 무표정인 발로텔리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발로텔리에게는 ‘악동’ 그 이상의 무언가 있었다. 

키예프(우크라이나)=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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