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비즈니스계 '뽀뽀공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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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플러스는 3만여 아이템에 2백여 브랜드를 갖춰 사이버 백화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패션지 편집장 및 기자출신으로 구성된 기획팀이 국내외 패션정보를 실시간 제공한다. 작년 매출은 25억. 올해는 50억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손익분기점 돌파가 목표다.

김해련 사장 약력
·1962년 2월生·1984년 이화여대 경영학과 졸업·1986년 미국 뉴욕 페이스 대학교 경영학 석사(MBA)·1988년 미국 F·I·T 패션 디자인 전공·1989∼1999년 브랜드 아드리안느 대표 겸 디자이너실 실장·1995년 6월 중국 대련 한국디자이너 초청 패션쇼 참가·1997년 2월 파리 프레타 포르테 전시회 참여·1999년 6월 웹넷코리아 대표이사(現)·2000년 1월 넥스트인터넷 대표이사(現)·2000년 10월 이화IT 감사 (現)

"잘록하게 묶어 맨 허리, 그 허리 끝 선을 타고 움직이는 남성들의 시선. 다시 부는 로맨티시즘의 영향일까, 아니면 ‘펀더멘털(기본)’에 충실한 여성들의 섹스 어필 욕구일까."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집결한 파리·밀라노·뉴욕에서 출시된 2001 춘하복 컬렉션에서 올 패션 최고 화두로 부상한 ''벨티드 패션(Belted Fashion)’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만이 영위할 수 있는 활동을 할 때 우리들은 인간임을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임을 인식하는 인간의 감성과 이성이 결합된 가장 인간적인 분야가 패션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패션에 인터넷이란 정보기술을 가장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 웹넷코리아의 김해련 사장(40)이다. 99년 국내 최초로 백화점 개념의 고급 패션 전문 쇼핑몰인 패션플러스(http://www.fashionplus.co.kr)를 개설, 2개월만에 월 매출 1억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한 김사장은 벤처업계에선 소문난 맹렬여성이다.

"근본적으로 안된다는 사고를 하고 시작해본 적이 없습니다. 뭔가 길이 있겠지, 답이 있으니 답을 찾자고 생각하고 찾아나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안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죠.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70년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박정희 대통령이 연상될 정도로 김사장의 추진력은 강력하다.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 일을 할 수 없다는 김사장의 좌우명 또한 ‘하면 된다’이다. 84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결정할 때도 그랬고 미국 페이스(PACE)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다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할 때도 그랬다. 도나 카렌이나 샤넬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행동으로 옮겨 미국의 유명 패션디자인 스쿨 F.I.T에서 공부한다. 당시 김사장은 한 학기에 14과목씩 수강하며 계절학기까지 들어가는 강행군을 펼쳐 2년 과정을 1년만에 마쳐버린다.

패션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하루 아침에라도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고 안된다고 보면 안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의류 등 패션에 관심이 많아 전공을 바꿨다기보다 MBA과정에 패션공부를 더한 것이라는 김사장은 5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귀국한다.

한국에 돌아오자 소망대로 89년 ‘아드리안느 김해련’이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부티크를 차린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아드리안느란 브랜드명은 천주교 신자인 자신의 세례명에서 따왔다. 그리고 타고난 창조적인 끼와 강력한 추진 기획력을 살려 ‘한국의 샤넬’이란 꿈을 키워간다.

98년까지 10여 년 동안 1만 벌 이상의 옷을 여한 없이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당시 고급 숙녀복으로 호평을 받은 아드리안느 브랜드는 롯데, 현대, 신세계백화점 등 유명 백화점에 10여 개의 매장을 갖추고 연간 80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잘나간다.

국내는 물론, 파리의 프레타포르테, 중국 대련시장의 한국디자이너 초청 패션쇼 참가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평탄대로처럼 잘 나가던 김사장에게도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94년부터 수입명품이 들어오면서 마켓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셔널 캐주얼 브랜드들이 대형화되면서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장기적 플랜 차원에서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역부족만 느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97년 IMF 된서리까지 맞으면서 한달에 1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던 매장이 2천만원 정도밖에 팔지 못했다. 매출이 60∼80%까지 떨어진 것이다.

올해 손익분기점 돌파가 목표

재고만 50억∼60억원 어치가 쌓였다. 김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재고 처리를 위해 LG-39 홈쇼핑 케이블에 매달렸던 그는 2시간만에 1억원어치의 매출을 올리는 네트워크의 위력을 실감한다. 때마침 인터넷 비즈니스를 접하면서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업 방향을 발견했다. 홈쇼핑에서 착안해 인터넷을 통한 패션 쇼핑몰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을 꾀한 그는 패션업계에서 쌓아온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한다.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을 이사로 영입하는가 하면 재무 전문가, 웹 엔지니어, 머천다이저 등을 모아 최상의 드림팀을 구성, 99년 6월 ‘나눔과 자유’(Sharing & Freedom)를 경영이념으로 하는 벤처기업 웹넷코리아를 설립했다. 그 해 9월에는 국내 최초의 패션 전문 사이트 패션플러스(http://www.fashionplus.co.kr)를 개설했다.

“인터넷 쇼핑몰은 원하는 물건을 쉽게 비교 검색할 수 있어 편리하죠. 가격도 시중보다 저렴합니다. 사업자 입장에선 오프라인 사업과 달리 재고 위험이 없는 데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고객을 상대로 직접 마케팅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 신개념, 고감도 패션 전문사이트인 패션플러스는 현재 3만여 개의 아이템에 2백여 개의 브랜드를 갖춰 패션 전문 사이버 백화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패션잡지 편집장 및 기자출신으로 구성된 기획팀이 운영하는 패션플러스 네트는 국내외의 생생한 패션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또한 모델 에이전시 사업을 하는 넥스트 인터넷이란 자회사도 설립했다. 지난 해 3월에는 섬유 및 패션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자 김사장이 주도하여 섬유 및 패션 회사들이 주주로 참여한 컨소시엄 형태의 비투비코리아도 설립해 최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인터넷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김사장에게 수익에 대해 질문하자 “인터넷 비즈니스를 갖고 1년만에 흑자를 내라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며 “오프라인 기업도 1년만에 흑자내는 것 봤느냐”고 되묻는다. 인터넷 비즈니스가 시작된 지 2년밖에 안되는 데 수익을 기대한다는 것이 너무 조급한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웹넷코리아는 지난 해 25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 50억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BP가 목표라는 김사장은 미국의 경우 “전문 쇼핑몰들만 살아 남았다. 결국 전문성을 확보해 스스로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것만이 생존 방법”이라고 말한다.

경영자로 조건을 묻자 긍정적인 사고로 나부터 솔선 수범해야 한다고 했다. 직원들과 한마음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며 ‘FROM ME’를 강조했다. 회사 전체의 분위기를 솔직하고 편안하게 자기 의견을 토론할 수 있는 회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사에서는 자신이 ‘뽀뽀공주’로 통한다고 말한다. 97년 핫(hot)메일 시절부터 뽀뽀(ppoppo)를 이메일 아이디로 사용했다는 그는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낼 경우, 반드시 마지막에 ‘뽀뽀공주’라는 별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 1, 중 3인 두 자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김사장에게 아이들에 대해 물었다.

“애들이 엄마를 자주 못 본다는 불만은 있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판단이 서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맹렬여성 김사장이지만 가족에 대해서는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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