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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악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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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29면

악수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친애·화해·합의를 나타내기 위해 서로 손을 맞잡는 행위’다.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음을 서로 확인한 것이 유래라는 설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최근 악수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여왕은 6월 27일 반영(反英) 무장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전(前)사령관 마틴 맥기니스를 만나 악수했다. 맥기니스는 총칼을 단념하고 정치 협상에 나서 현재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제1장관을 맡고 있다. 그가 과거 적으로 여겼던 영국 여왕과 악수한 것은 북아일랜드 사태의 커다란 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도 총독을 지낸 사촌 리처드 마운트배튼 공을 1979년 IRA 폭탄 테러로 잃은 여왕의 관용 정신도 새길 만하다. 영국 BBC방송은 이를 ‘역사적인 악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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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악수는 그것 말고도 많다. 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과 두 손을 잡은 게 백미다. 양국은 그 뒤 상호 적개심과 불신을 씻고 해빙 무드 속에 대(對)소련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닉슨은 “세상을 바꿨다”고 자평했다.

77년 11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악수한 것은 47년 이래 30년간 계속됐던 중동전쟁을 종식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다트는 아랍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찾았다. 6개월 뒤 이들은 역사적인 캠프데이비드 중동평화협정을 일궈냈다. 그 공로로 7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고 이듬해 양국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사다트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슬림 과격파 군인들에 의해 81년 암살당했다.

85년 11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한 사건은 냉전의 종결을 상징한다. 미·소 대결이 종식된 직후 소련 체제는 급격히 붕괴됐다. 90년 5월 남아공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인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르크가 케이프타운에서 반정부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만나 악수한 것은 역사적이다. 만델라는 불과 3개월 전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날 두 사람은 소수 백인정권의 종식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4년 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 돼 흑백 정권교체를 평화롭게 이뤄냈다.

93년 9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만나 악수한 것은 중동평화의 전진을 의미한다. 철천지원수이자 앙숙인 양측의 지도자가 공개 장소에서 만나 악수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들이 이룬 아랍-이스라엘 평화협정에 의해 지금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게 됐다. 물론 아직도 평화는 요원하지만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13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했다. 분단 이후 양측 지도자 간의 첫 악수다. 두 사람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정착, 민족 화해와 단합, 남북 교류와 협력을 명시한 6·15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아직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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