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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카다피 사망 8개월, 리비아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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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무아마르 카다피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주먹 동상’은 미스라타 혁명 기념관 앞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미군기를 움켜쥔 주먹 모양의 이 조형물은 원래 구릿빛이었지만 시민군에 의해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 색깔로 덧칠해졌다. [최승식 기자]

지난해 ‘아랍의 봄’은 리비아에서 가장 가혹했다. 반정부 시위는 내전으로 격화했고, 국민은 독재자를 축출하기 위해 서방의 폭격을 감내해야 했다. 2011년 10월 리비아 해방 선포가 있기까지 사망자 3만 명, 실종자 5만 명, 난민 7만 명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내전 종식 후 8개월, 리비아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9일 수도 트리폴리와 ‘혁명의 성지’ 미스라타로 향했다.

 낙서와 사진의 도시, 트리폴리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별명은 ‘지중해의 인어’다. 푸른 지중해와 하얀색 건물들이 어우러지는 풍광을 일컫는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벽도 하얗지 않다. 건물마다 온통 스프레이 페인팅과 낙서 투성이다. 아랍어와 일부 영어로 쓰인 낙서들은 ‘리비아 해방’ ‘신이여 가호를’ ‘카다피여 물러나라’ 등이다. 카다피를 쥐 몸통에 합성한 캐리커처도 눈에 띄었다.

 혁명은 낙서에서 시작됐다. 42년간 숨죽여 있던 벽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주간신문 트리폴리포스트의 사이드 라스와드 편집국장은 “언론의 자유는 말하는 자유다. 카다피 반대 낙서를 트리폴리 벽에서 처음 목격한 날, 나는 전율을 느꼈다. 우리가 독재자를 쫓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시민들은 낙서를 벽에 휘갈기며 처음으로 공포와 마주했다. 막상 직면하자 상상했던 것만큼 두렵지 않았다. 밤에 시민이 낙서하면 다음날 경찰이 지웠다. 더 이상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낙서가 도시를 뒤덮었을 때 ‘카다피 물러나라’는 실제 함성으로 터져 나왔다. 지난해 8월 20일 트리폴리 시민들은 각지에서 진격한 해방군과 힘을 합쳐 카다피를 축출했다. 도주한 독재자는 그해 10월 고향 시르테에서 분노한 시민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리비아 내전 종식 8개월. 치열했던 전쟁의 현장을 찾아 기자가 확인하려 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내전은 리비아에 무엇을 남겼는가. 둘째, 이들의 민주화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첫째는 비교적 쉽게 눈에 띄었다. 트리폴리는 두 가지 점에서 여느 도시와 달랐다. 엄청난 낙서가 그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진들이다. 길거리 건물 벽이나 가로수 여기저기에 청·장년의 얼굴사진이 붙어 있었다. 때로 10대 앳된 얼굴도 있었다. 운전사 알리가 “순교자(martyr) 사진들”이라고 가르쳐 줬다. 지난해 혁명에 참여했다 스러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트리폴리에서만 그 숫자는 500명에 이른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진도 있다. 한때 관공서와 길거리 입간판을 도배했던 카다피 사진은 자취를 감추었다. 트리폴리 주재 KOTRA 이길범 관장에 따르면 주리비아 한국대사관이 있는 신시가지에서 KOTRA 건물이 있는 구도심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갈림길마다 카다피 사진간판이 있었다. 어떤 것은 군복 차림이고 어떤 것은 전통 복식이었다. 이 관장은 “그걸 보며 방향을 구분하곤 했는데 혁명 이후 싹 바뀌어서 요즘은 길 찾는 데 애 먹는다”고 했다. 지금은 의류와 유아용품 광고판으로 쓰인다.

미스라타, 비극을 기억하라

 “이름이?”

 “민션 이널리스트.”

 “무슨 일을 하시죠?”

 “이곳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자원봉사 하고 있소. 원래는 철물점을 했는데, 지금은 가게도 일거리도 없어요.”

 “혁명 기간엔 무얼 하셨죠?”

 “시민군의 무기를 만들었소. (기자에게 녹슨 장총과 수류탄 등을 보여주며) 이게 다 우리가 만든 거라오. 놈들은 탱크를 밀고 왔지만, 우린 이걸로 버티고 싸웠어요.”

 “가족들은 무사한가요?”

 “사촌·조카 등 12명을 잃었어요. 미스라타에서 죽은 사람 모두가 내 친척이나 다름없소. 여긴 모두 한 부족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죠.”

 “(싸운 걸) 후회하진 않나요?”

 “전혀. 내가 살아남은 게 미안하지. 혁명으로 우린 전혀 다른 사람이 됐소. 전엔 누가 내 말을 엿듣지 않나 눈치만 살폈는데, 이젠 서로 믿고 자주 웃죠. 당장 생활이 힘들어도 괜찮아요. 우린 나쁜 놈(카다피)을 무찔렀으니까.”

 트리폴리 서쪽으로 200㎞ 떨어진 도시 미스라타. 이곳 중앙도로(트리폴리 스트리트) 양쪽엔 격렬했던 전투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곳곳이 포격에 무너졌고 남은 건물도 반쯤 불탄 채다. 시내 입구의 아부샬라 병원은 정문이 흔적 없이 날아가버렸다. 통역을 해준 무나는 정부군이 병원을 기지로 삼고 시민군에게 총포를 쐈다고 증언했다. 정부군과 시민군이 일진일퇴 공방을 벌인 미스라타는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다. 인구 45만 명 가운데 1800명이 숨졌다. 자위야와 트리폴리가 각각 580명, 500명으로 뒤를 잇는다.

 민션 이널리스트를 만난 곳은 트리폴리 스트리트에 자리한 이른바 ‘혁명 기념관’에서다. 순교자 기념관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원래 쇼핑몰이었다. 건물소유주가 혁명을 자축하는 뜻에서 기념관으로 쓰게 내줬다. 입구엔 트리폴리의 밥 알아지지야(카다피의 복합관저)에서 옮겨온 독수리와 주먹 동상이 서 있다. 내전 중에 사용된 미사일발사대, 화염방사기 등 무기도 전시되고 있다. 카다피 얼굴이 수놓인 카펫을 밟고(일부러 밟게끔 놔둔 것이다) 문 안에 들어서면 사면 벽에 온통 사진이다. 내전 중에 희생된 이들이다. 전시관을 구경하러 자녀들과 함께 지방에서 왔다는 40대 남성은 이를 보며 “리비아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리비아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 중이다. 도처에서 카다피 통치의 흔적 지우기가 한창이다. 카다피의 녹색기 대신 왕정시대 삼색기가 복귀해 전역에 펄럭였다. 트리폴리의 그린(녹색) 광장은 순교자 광장으로 바뀌어 불린다. 기자의 녹색 페디큐어(발톱 색조)를 보고 통역 가이드가 “카다피 색깔”이라며 놀릴 정도였다.

 때로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미스라타의 폴리클리닉(종합보건소의 일종)에서 일하는 외과의사 아크람 그리완은 요즘도 가끔 악몽에 시달린다. 내전 기간 응급 구호를 호소하던 환자들의 비명이 귀에 선하다.

 “시위가 내전이 되면서 환자가 10배 이상 늘었죠. 침상도 전기도, 무엇보다 의사가 부족했어요.”

 한 의사는 가족이 차량 공격으로 몰살당했지만, 다음 날 다시 병원에서 치료에 나서야 했다. “부상당한 누구라도 치료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양쪽 전선에서 일했던 의료진은 양쪽에서 위협에 시달렸죠. 구급차를 공격하는 일도 있었어요. 되풀이돼선 안 될 비극입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폭발물 제거 활동

내전은 끝났지만 리비아 전역에 흩어진 잔류 무기들은 또 다른 재앙요소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무기제거팀(아래 사진)이 수거한 잔류 무기를 나푸사 사막에서 폭발시키는 장면(위). 불기둥이 100m 높이로 치솟았다.

 타당탕탕-. 한밤 트리폴리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에게 묻자 ‘해피 슈팅(happy shooting)’이라는 해석이 돌아왔다. 총을 가진 이들이 밤에도 기분이 좋으면 허공에 총을 쏜다는 것이다.

 통역 가이드 달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도심에서 실제 총싸움이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했다. 간간이 어디선가 포성도 들린다고 한다. 특히 폐허가 된 밥 알아지지야는 위험지역으로 꼽힌다. 은신한 카다피 지지자들이 관광객이나 외국인을 상대로 공격한다는 풍문이 돈다. 기자가 둘러봤을 때도 그리 멀잖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내전 이후 리비아 과도정부(NTC)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총기다. 내전 중 공급됐다가 회수되지 않은 총기가 전국적으로 25만 정에 이른다. 최대 50만 정이라는 추정도 있다.

내전은 끝났지만 리비아 전역에 흩어진 잔류 무기들은 또 다른 재앙요소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무기제거팀.

 트리폴리 해방군으로 진격했던 각 지역 민병대가 돌아가지 않고 일부가 갱단으로 변해버린 것도 문제다. 최근에도 일부 민병대가 보상을 요구하며 트리폴리 국제공항을 점거하는 사태가 있었다. 또 다른 악재는 아브살린 교도소의 ‘해방’이다. 정치범이 다수 수감돼 있던 이곳이 시민군에 의해 열렸을 때 함께 수감돼 있던 흉악범들도 풀려났다.

 내전은 과연 끝난 것인가. 최근 동남부 알 쿠푸라에선 부족 간 충돌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 또 인도적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미스라타와 벵가지 본부도 잇따른 공격을 받았다. 트리폴리에서 만난 리비아 국제적십자위원회 단장 조지 코미노스는 “전쟁 이후 남겨진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 리비아에서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전쟁과 카다피 통치 기간 중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리비아 정부와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감식 작업을 공동으로 하고 있다.

치안 불안은 외국 기업이 돌아오는 데 꺼리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석유부국 리비아는 올해 재건 예산만 685억 디나르(약 64조8000억원)를 잡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빈발하면서 외국 기업들은 재건 사업을 포함한 리비아 투자에 신중함을 보인다. 과도정부하에서 재건 기금 집행 절차가 더딘 것도 불확실성을 높인다. 최근 리비아 외무장관이 한·중·일 3국을 순방하며 산업 관계자들을 만나 강조한 것도 “리비아 치안이 안정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 그대로 믿는 이는 없다.

 민주화에 대한 다른 생각, 같은 꿈

 “무슨 일을 하시죠?”

 “리비아 선거감시협의회 부대표입니다. 공정선거가 이뤄지도록 감시하는 시민단체지요.”

 “혁명 기간엔 무얼 하셨어요?”

 “해외에 있었어요. 카다피 독재가 싫어서 미국에서 7년, 카타르에서 6년 등 돌아다녔죠. 지난해 9월 귀국했습니다.”

 “리비아에 굳이 민주화 혁명이 필요했던 이유가 뭘까요. 당신은 해외에서도 잘 살았잖아요.”

 “나는 한순간도 리비아 민주화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어요. 조국에서 존중받지 못한 국민을 존중해주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루르 벤무사(38)는 정보기술(IT) 전문가다. 1994년 리비아를 떠난 그는 17년 만에 트리폴리로 귀향했다. 자비를 털어가며 시민단체를 운영하는 이유를 묻자 “국민들이 총칼을 들고 싸울 동안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젠 내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헌신할 차례다”고 말했다. 공정사회가 구현되면 그가 계획하는 IT 사업이 탄탄하게 굴러갈 거란 기대도 있다.

 리비아엔 내전 종식 이후 벤무사처럼 귀국한 이들이 50만 명에 이른다. 대부분 서방의 자유와 자본의 맛을 봤다. 꽁꽁 통제됐던 카다피 치하 리비아인들과 현저한 인식 차가 있다. 벤무사는 “솔직히 그들보다 우리가 더 교육 받았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많다. 무지한 사람들을 설득해 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예의주시하는 것은 7월 7일 제헌의회 선거다. 카다피 몰락 이후 무법 진공상태가 된 국가체제를 처음부터 만드는 작업이다. 69년 카다피 집권 이래 처음으로 치러지는 직접선거다 보니 정파·부족 간에 알력과 다툼이 치열하다. 일각에선 NTC가 최근 카다피 치하 수감자들에 대해 거액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한 게 공정성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수형자 상당수가 무슬림형제단이란 점에서 이는 무슬림형제단에 선거자금을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공정선거감시단 대표 압둘 르자왈아디)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는 나쁜 놈(카다피)을 물리치느라 단결했다. 앞으로 리비아는 분열을 통합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트리폴리 포스트의 라스와드 편집국장의 말이다.

 그러나 혼란과 불안이 민주화를 후회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트리폴리 공대 대학생 아흐메드 베하스(25)의 꿈은 대통령이다. 지난해 초까지 꿈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독재자를 내쫓으면서 꿈을 현실화할 가능성이 열렸다. 선관위 자원봉사 사무실에서 만난 베하스가 말했다.

 “리비아는 42년간 멈춰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게 도전이고 시련이다. 하지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에겐 변화다. 그것으로도 민주화의 가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전 중 풀린 총기 25만정 … 한밤 트리폴리선 아직도 총성·포성

트리폴리·미스라타(리비아)=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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