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탈북 노교수 “평양 표준어 성경으로 북 개방 이끌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현식 미국 조지 메이슨대 교수(왼쪽)가 평양 표준어로 번역한 성경.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십자가는 ‘십자 사형틀’로 번역했다. 북한 주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초 김현식 평양사범대 교수는 모스크바의 국립러시아사범대 교환교수로 있었다. 어느날 옆방의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어로 된 성경책을 선물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세기’라는 말은 ‘창 끝의 세기’인가 라고 생각했고, 신약은 새로 나온 약인 줄 알았다. 이것도 책이냐며 성경을 집어던졌지만, 한편으론 ‘여러 사람이 이토록 권하는 성경이라면 북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도 필요하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2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성경의 내용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된, 팔순의 김씨는 그때 생각대로 영어 성경을 평양 표준어(문화어)로 번역했다. 27일 펴낸 『하나님의 약속』이다. 38년간 평양사범대 교수를 지낸 그는 1992년 탈북했고, 한국을 거쳐 지금은 미국 조지 메이슨대 교수로 활동 중이다.

 “북에 살면서 인권이란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는 그는 “언어의 힘으로 북한을 개방시키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좋은 단어, 의미있는 표현을 계속 접하면 교육 효과가 발생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성경을 택한 건 정치색이 적어 북한 주민들에게 쉽게 파고들 수 있다고 믿어서다. 이번 작업을 종교적 차원으로만 바라보지 말아 달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 전체 내용은 아니다. 일단 요한복음서만 번역했다. 성경의 나머지 내용도 곧 번역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번역은 철저하게 평양 표준어에 기초했다. 십자가는 ‘십자 사형틀’로, 복음은 ‘기쁜 소식’으로, 신약은 ‘예수 후 편’으로 썼다.

 김씨는 이번에 영어와 평양말을 함께 적은 대역본도 내놨다. 최근 북한 내 영어 열풍이 뜨거워 북한말 성경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그는 “우선 탈북자와 러시아의 고려인, 북한말을 할 수 있는 재일 교포들에게 책을 뿌릴 생각”이라고 했다. 요즘처럼 북·중 국경이 느슨한 상태에선 어떻게든 북한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김 교수는 북에 있을 때 김정일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등 20년간 김일성 일가의 개인교사로 활동했다. 그 만큼 핵심층과의 친분이 두터웠고 보고 들은 게 많았다.

 “1990년대 초 김일성 주석이 ‘미국과 싸우다 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습니다. 장군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벌떡 일어나 ‘원자탄으로 지구를 다 깨트려 버리겠다’고 했죠. 이후 김 위원장은 군 최고통수권자가 됐고 지난해 죽기 전엔 핵무장하라는 유훈까지 남겼습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북한 김정은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력자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20년 지기라는 그는 “북한이 핵은 포기하지 않겠지만 장 부위원장의 개방적인 성향으로 볼 때 북한의 노선이 조만간 개혁개방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평양이 변할까』라는 책도 집필 중인 노교수의 마지막 소망은 남과 북이 조금씩 양보해 평화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남북이 합치면 얼마나 좋은 나라 되겠습니까…” 인터뷰 도중 여러차례 눈물을 터뜨린 그의 코끝이 또 빨개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