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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금장치 없는 교실서 옷 갈아입는 여중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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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2일 오전 서울 관악구 A중학교 3층의 2학년 교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이모군 등 남학생 3, 4명이 체육복을 손에 들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들은 경주를 벌이듯 복도를 달려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랐다.

 학생들이 당도한 곳은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부에 설치된 넓이 7㎡ 크기의 임시 구조물. 공식적인 탈의실은 아니지만 간이문이 달려 있어 남녀 학생 500여 명이 다니는 이 학교에서는 유일한 탈의 공간으로 불린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다른 학급 남학생 다섯 명이 옷을 갈아입고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군 등은 “이러다 체육수업에 늦겠다”며 복도 반대편의 남자 화장실로 급히 뛰어들어 갔다. 화장실 역시 체육복을 갈아입는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이군 등은 “우리 학교는 남녀 합반이라 남학생은 주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며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했다. 또 “간혹 지저분한 바닥에 옷을 떨어뜨릴까 봐 늘 걱정”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그동안 인성교육 강화 차원에서 체육수업 확대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체육수업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에는 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전국의 남녀 공학 중·고교 3612곳 가운데 A중처럼 탈의실이 없는 학교가 1350곳(37.4%)에 이른다. 남녀 공학 10곳 중 4곳엔 탈의실이 없는 것이다. 탈의실이 있는 학교도 공간이 매우 좁다. 이렇다 보니 탈의 문제는 일부 초·중·고교생에게는 불편을 넘어 극심한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국가청소년위원회가 2006년 청소년 3200명에게 ‘학교에서 겪는 고충’을 묻자 ‘탈의실이 없다’(81%)는 응답이 1위였다. 서울대 의대 김붕년(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옷 갈아입는 과정을 남에게, 특히 이성에게 노출하는 것은 급격한 신체 변화를 겪는 청소년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은 남녀 공학 여부와 관계 없이 중·고교 한 곳당 탈의실 3개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 유휴 공간과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이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중 2학년 여학생을 둔 서울의 한 학부모는 “교실 안에 커튼이라도 달아 달라고 수차례 학교에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라고 말했다. 정문진(새누리당) 서울시의원은 “남녀 평등 교육 강화로 2000년 이후 남녀 공학 비율이 늘고 있지만 탈의실은 제자리”라며 “교실이나 복도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탈의 공간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탈의실이 없어 교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쪽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남녀 공학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교실에서 옷을 갈아입지만 교실을 들락거리는 남학생들 때문에 불편하기만 하다. 이렇다 보니 교복 안에 반팔 티셔츠를 받쳐 입고 와서 그 위에 체육복을 겹쳐 입는 여학생이 많다. 이들은 체육수업이 끝난 뒤에는 땀에 전 티셔츠 위에 교복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다.

 서울 성동구의 B중학교 2학년 김모양은 “교실 문에 잠금장치가 없다 보니 여학생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남학생이나 선생님이 무심코 문을 열어 불쾌한 적이 많다”고 말했다. 같은 반의 박양은 “복도를 지나는 남학생이 까치발을 하고 창문 너머로 여학생이 옷 갈아입는 것을 힐끗 쳐다보기도 한다”고 거들었다.

 심지어 교복 위에 체육복을 입고 체육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있다. 서울 강북의 C중학교 1학년 김모군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니 번거로운 데다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 학교 체육 교사는 “학급당 대여섯 명은 옷을 갈아입느라 체육수업에 늦지만 아이들 사정을 뻔히 아니 마냥 혼낼 수도 없다”고 말했다.

 탈의실 부족은 체육수업에도 지장을 준다. 경희대 전병관(스포츠심리학) 교수는 “탈의실 부족은 학생들이 학교 체육에서 멀어지는 요인 중 하나”라며 “교육당국이 인성 함양을 위해 체육 시수를 늘리지만 정작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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