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형의 우승 위해 함께 뛰는 가족 캐디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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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둘이 애인인가 봐. 애인이 캐디를 하나 보네."

23일 충북 제천의 힐데스하임 골프장에서 열린 볼빅-힐데스하임오픈 3라운드 1번홀. 갤러리들이 수군거렸다. 국내 골프장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낯뜨거운(?) 장면을 목격해서다. 하비 코로모(스페인)가 경기를 시작하려고 하자 그의 캐디 크리스티나가 다가와 진한 키스를 했다.

크리스티나는 코모로의 아내이자 전담 캐디다. 둘은 지난 2009년 선수와 캐디로 만났다. 2007년 스페인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2009년 슬럼프를 겪은 코모로는 동료 선수를 통해 크리스티나를 소개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전문 캐디는 아니었지만 부모님과 삼촌 셋이 선수 생활을 한 골프 집안에서 자라 골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코모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함께 호흡을 맞추며 사랑에 빠진 둘은 2010년 결혼식을 올렸다. 2011년 스페인 투어 푸조 그라우 파이날에서 우승을 합작하는 등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코모로와 크리스티나는 이 날도 5언더파 67타를 합작하며 중간 합계 8언더파로 공동 선두에 올랐다. 대회 코스는 그린이 롤러코스터처럼 생겨 퍼트하기가 까다롭지만 코모로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퍼트했고 버디 4개를 잡아냈다. 코모로는 “크리스티나는 그린이 아무리 어려워도 라인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선두로 올라서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표정만 봐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 오늘도 11번홀에서 보기를 범하고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침착하라’고 등을 두드려 줬다. 내 말을 가장 잘 듣는 선수다”라고 말했다.

올 시즌 아시안투어에 데뷔한 코모로는 크리스티나의 도움으로 아시안 투어 첫 우승을 노리게 됐다. 코모로는 올 시즌 9개의 아시안투어에 출전했다. ISPS 한다 싱가폴 클래식에서는 공동 2위에 올랐다.
코모로는 “동료가 낯선 코스에서 열리는 대회라 전문 캐디가 필요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난 전문 캐디보다 아내와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하는 게 더 좋다. 이젠 아내가 없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을 것 같다. 꼭 우승해서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회에 특별한 캐디는 또 있다. 시즌 첫 언더파를 기록하며 부활의 샷을 날리고 있는 김대현(24·하이트)은 동생 김정현(22)씨에게 캐디 백을 맡겼다. 정현씨는 청각 장애인이라 말을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대현은 경기 중 입 모양과 손을 사용하며 동생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김대현은 “동생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지만 대신 시각이 매우 발달했다. 그래서 나보다 그린 라인을 더 잘 읽어 낸다”며 “이 대회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현이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2008년 일본에서 열린 에머스퍼시픽 돗토리현 오픈에서 첫 호흡을 맞췄다. 당시 김대현은 동생의 도움을 받아 7위에 올랐다.
동생 정현씨는 “내가 먼저 캐디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형이 올 시즌 부진해서 속상했는데 결과가 매우 좋아 만족스럽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잘 해서 형이 꼭 우승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을 형을 통해 전했다.

제천=오세진 기자 seji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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