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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주사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6호 34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량도 두주불사다. 술에 약하다면 그다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는 그렇다. 드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은 애주가지만 입술 적실 정도로 마시고도 만취한다. 내가 그렇다. 나는 ‘소주량 애주가 만취 클럽’의 회원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주사파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고 취하면 반드시 시끄러워진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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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술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고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술 맛은 사람 맛이라고.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 맛은 술 맛이다.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마시든 술은 맛있다. 술에 안 취한 나는 우유부단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딴사람이 된다고 한다. 자신감 있고 유쾌하고 박력 넘치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전혀 논리가 없는 사람이 문득 하는 말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조목조목 논리가 정연해진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술에 취해 있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빠진다.

만취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 기억의 필름은 알코올에 민감해 혀끝에만 닿아도 툭 하고 끊어지기 때문이다. 술 마신 다음날 사람들이 내게 말해주는 나의 언행은 도무지 내가 한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이 사실인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또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술 취한 내 언행이 재미있었다고 말하지만 만일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언젠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직원이 있는 회식자리였는데, 술에 취한 내가 유쾌하게 그 신입 직원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고 한다. 물론 악의 없이 장난 삼아 살짝 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취한 사람의 감각일 뿐 다른 자리의 손님들도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쿵 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는 사태였던 것이다. 다행히 신입 직원이 어릴 때부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벽에 이마를 찧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 박치기 후에 쓰러진 사람은 나였다고 한다.

또 언젠가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 중 누군가 술 취한 내가 떠드는 이야기가 하도 재미없어 그만 일어서 가려고 하니까 그 사람 팔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도 가려고 하자 팔을 뒤로 꺾어서 비틀었다고 한다. 아프다고 해도 나는 잡은 팔을 계속 풀지 않은 채 논리 정연하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달아나려는 사람에게 헤드록까지 걸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는 ‘사이코패스’인 것 같다.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공감하는 감수성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그런 버릇은 없어졌다. 옛날의 술버릇이 그나마 화려하고 박력 넘치는 것이었다면 요즘의 것은 소박하고 조신한 편이다. 만일 ‘소주량 애주가 만취 클럽’ 모임에서 입술을 적실 정도의 술에 취한 내가 정신을 놓고 꿈꾸듯 앉아 있다고 하자.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주인이 “손님, 이제 마칠 시간입니다”라며 나를 깨운다. 나는 정말 잠이라도 자다 깬 사람처럼 정신이 돌아와서는 함께 왔던 일행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며 그 사람들을 찾는다. 그럴 때 주인은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손님, 올 때 혼자 오셨는데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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