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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즈 칼럼

허생전과 독과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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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지철호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국장

고전소설 ‘허생전’에는 가난한 선비였던 허생이 장사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내용이 있다. 빌린 돈 1만 냥을 밑천으로 백성이 사용하던 생필품을 몽땅 구입했다가 나중에 비싼 값으로 되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국의 월마트는 납품업체를 지나치게 쥐어짰고, 일부를 도산시키기도 해 미국의 실업자를 늘렸다. 납품가격을 후려치다 보니 제조업체가 어려워졌고 이를 못 견디면 망했다. 그래도 월마트는 거래처를 저개발 국가의 값싼 제품으로 전환해 이익을 내면 그만이었다. 신문기자였던 찰스 피시먼이 쓴 『월마트 이펙트』 내용이다.

 동서고금을 초월해 두 책에서는 독과점 유통이 초래하는 문제의 일단을 공통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통업에서 독과점이 심화하면 이런 폐해가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우리나라 유통업은 1996년 시장 개방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백화점, 대형마트 등 업태별로 상위 3개사가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독과점이 급속도로 심화됐다. 그러다 보니 유통의 전문화나 효율화에 의한 이점도 일부 있었지만, 독과점 남용행위가 구조적·행태적으로 갈수록 다양하고 교묘하게 진화해 왔다.

 대형 유통업이 발전하면서 제조업이 쪼그라들고 있다. 제조업 이익률은 과거엔 대형 유통업을 앞섰지만 2007년부터 역전됐다. 해마다 격차가 벌어져 이제는 유통업의 이익률이 제조업을 훨씬 앞섰다는 것이 최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분석 결과였다.

 또 국내 3대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매출액은 지난 10여 년간 2.2배 정도 늘었는데 순이익은 약 4.8배나 증가했다. 이들 유통업체가 납품업체에서 값싸게 구입했지만 소비자에게 결코 저렴하게 판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늘어난 이익으로 인수합병(M&A)이나 신규 출점을 해 골목상권까지 마구잡이로 진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판매량이 늘었다는 이유로 제조업체에 추가 단가인하를 요구하거나 판매장려금 인상을 요구해 더 많은 이익을 올리고 있다. 일부 대형 유통업체에는 선순환이지만 제조업체나 골목상권 입장에서는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폐해는 각종 불공정행위로 나타난다. 판매수수료를 과도하게 인상하고, 납품업체에 일방적으로 판촉사원 파견을 요구한다. 유통업체가 스스로 부담해야 할 인테리어 비용까지 떠넘기고 상품권 구입 등을 강요하기도 한다. 납품업체의 전산망에 접속하는 아이디(ID)나 비밀번호를 요구해 판매정보를 파악하기도 하고, 계약서를 사후에 작성해 형식적으로 갖춰 놓기도 한다. 겉으로는 시장경제 원리나 계약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오로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경쟁 질서를 왜곡하며 갖가지 횡포를 부리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의 성장은 비용 절감과 가격 경쟁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품질 좋고 저렴한 상품을 편리하게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제조업체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중소 납품업체와 소규모 유통업자의 몰락을 가져오는 단점도 있다.

 동반성장은 대·중소 제조업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형 유통업체와 납품업체는 물론 나아가 제조업과 유통업,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대규모 유통업법을 새로 제정해 불공정행위에 적극 대처하고, 판매촉진활동 비용을 유통업체와 납품업체가 분담하는 대책들이 그래서 추진되고 있다.

지철호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