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 센츄리 베스트 - (2) 한신 : 팀의 역사 <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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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 플라이어스에 패해 아쉽게 정상의 문턱에서 물러나야 했던 한신은 전열을 가다듬고 2년 후인 `64 시즌 다시 센트럴 리그를 제패하며, 퍼시픽 리그 최고의 강자 '난카이 호크스 (南海 ホ-クス)'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다이마이 오리온즈 출신의 강타자 야마우치 가즈히로 (山內 一弘 / 31홈런, 94타점)가 가세하여 한층 폭발력 있는 타선으로 변모한 한신은, 간판 유격수 요시다 요시오(吉田 義男)를 중심으로한 잘짜여진 타선과 진 벅키 (Gene Bacque), 무라야마 미노루 (村山 實, 사진) 등의 투수진의 조화가 어우러지며 시즌 막바지까지 1위 자리를 위협했던 다이요 훼일즈 (大洋 ホエ-ルズ)를 누르고 정상에 오른다.

반면에 난카이 호크스는 시즌 타격왕을 차지한 히로세 요시노리 (廣瀨 叔功 / 타율 .366, 72도루)와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노무라 가츠야 (野村 克也 / 41홈런, 115타점 - 2관왕)를 중심으로한 타선의 응집력과 조 스탠카 (Joe Stanka), 스기우라 다다시 (杉浦 忠)의 원투 펀치가 돋보이는 당시 퍼시픽 리그의 'NO. 1' 구단이었다 (양리그 분리 후 첫 15년간 7회 우승).

시리즈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64 시즌을 통해서 양팀의 에이스로 급부상한 용병 투수, 조 스탠카 (26승 7패, 방어율 2.40)와 진 벅키 (29승 9패, 방어율 1.89)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스탠카의 압승. 스탠카는 시리즈 중 가장 중요한 1차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것을 비롯, 팀이 2승 3패로 역전 당해 위기에 처했었던 6, 7차전에 연거푸 등판하여 모조리 완봉승을 따내므로써 (4 : 0 / 3 : 0) 외국인 최초의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조 스탠카의 완벽 투구에 힘을 얻은 난카이 호크스의 파상적 공격 앞에 한신은 결국 3승 4패로 또다시 패퇴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65 시즌, 그 유명한 '교진군 (巨人軍)의 일본 시리즈 9연패'가 시작된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川上 哲治)의 지휘 아래, 초(超) 막강의 투수진과 'O-N'이라 명명지어진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長島 茂雄)의 괴물 콤비 앞에서 한신은 매시즌 힘의 부족을 절감해야 했었다.

그나마 주니치 드래곤즈와 함께 리그 내에서 요미우리에 대적할 수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전국의 '안티 자이언츠'팬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데, 전편에서도 이야기 했던 '지역적 정서'와 선수들간의 강한 '라이벌 의식'까지 합쳐져 상대적으로 주니치보다는 더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요미우리와 한신과의 경기는 내용과 승패에 관계없이 늘 야구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를 가리켜 일본 매스컴들은 '교-신센 (巨人-阪神戰)' 이라 칭하며 연일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하였다.
'교-신센' 제 1의 라이벌은 '자토펙 투수 (48년 런던 올림픽과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장거리 4관왕을 차지했던 육상 선수의 이름)' 무라야마 미노루와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였다.

체질적으로 요미우리가 맞지 않았던 무라야마는 '교진군'이라면 반드시 때려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자신 보다 프로야구계에 1년 먼저 등장하여 이미 '교진군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나가시마를 잡는 길이야 말로 요미우리를 쓰러트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 그와의 대결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투구를 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무라야마는 비록 `59 시즌 중, 나가시마로 부터 그 유명한 '천람 시합 (天覽試合, 일본 천황이 친히 관전하는 시합)'에서 9회말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기도 했었으나, 그를 자신의 통산 2000개째 탈삼진 (69. 8. 1)의 재물로 삼기도 하는 등 늘상 서로 물고 물리는 설전을 펼쳐 내어 많은 야구팬들의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제 2의 라이벌은 '천재 투수' 에나츠 유타카 (江夏 豊)와 '세기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였다. 67년 드래프트 1위로 한신에 입단했던 에나츠는 비록 고시엔 무대를 밟아 보지는 못했으나 빠른 공의 위력만으로도 프로 관계자들 및 팬들로 부터 '장래의 재목'이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다.

그리고 에나츠는 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다소 실망스런 신인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이듬해 `68 시즌부터는 '천재 투수'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68 시즌에 작성한, 일본 기록이자 세계 기록인 시즌 최다 탈삼진 (401) 기록은 그가 가진 많은 기록 중 단연 최고.

에나츠는 일본 야구계의 최고 타자로 자리잡은 오- 로 부터 종전 니시데쓰 라이온즈 (西鐵 ライオンズ)의 에이스 이나오 가즈히사 (稻尾 和久)가 `61 시즌 때 수립했던 일본 최고 기록인 353개의 타이 기록과 신기록을 세워 그 가치를 더욱 빛내었다 (그를 기록의 제물로 삼기 위해 그가 아닌 다른 선수가 삼진 당하기 않기를 바랬던 사실도 매우 유명하다).

물론 에나츠도 2:0으로 리드 하며 완봉승을 눈앞에 두었었던 경기에서, 앞타석까지 3연타석 삼진으로 솎아 내었던 오-로 부터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기도 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에나츠를 상대로 가장 많은 홈런을 쳐낸 선수가 오- (20개, 오-에게 있어서는 전체 투수중 4위)였고, 또 반대로 오-에게서 가장 많은 삼진을 뽑아낸 투수도 에나츠였다는 사실 (57개)이다.

에나츠는 79년 5월11일 요미우리 전에서 오-로부터 자신의 2500개째 삼진을 뽑아내어, 라이벌 관계의 선배격인 '무라야마 - 나가시마의 2000 탈삼진 경기'와 비슷한 꼴을 연출해 내기도 했다.

타자 중에는 호세이 대학 출신의 슬러거, 다부치 고이치 (田淵 幸一)가 있었다. 6대학 야구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던 그는 원래 "자이언츠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었으나, 자신을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한 한신을 져버리고 요미우리와 드래프트 전 밀약을 했었던 사실이 들통나 어쩔 수 없이 한신에 입단한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올바른 정신 상태를 가진 선수였다. 입단 후 가졌던 인터뷰에서 그는, "이왕 한신에 들어온 만큼, 이제부턴 요미우리 타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 호언장담 하였고, 이후 자신의 말대로 고비 때 마다 한방씩을 터트리며 자이언츠 투수진을 수차례 괴롭히곤 하였었다. 그 대표적인 기록이 바로 對 요미우리 전 7연타석 홈런이다 (`73 시즌 4.24 ~ 5.10).

'반(反) 자이언츠 선봉장' 으로써 한신의 위력이 가장 극명히 드러났던 시즌은 바로 `73 시즌이었다. 다부치 고이치를 중심으로 후지타 타이라 (藤田 平) - 후지이 에이지 (藤井 榮治) - 이케다 슌이치 (池田 純一) 등으로 짜여진 타선과 에나츠 유타카와 우에다 지로 (上田 二郞) 등의 투수진이 시즌 막바지까지 리그 9연패를 노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73년 10월 10일, 요미우리의 홈구장인 고라쿠엔에서 펼쳐진 양팀의 24차전. 1게임 차로 리그 2위를 달리던 한신은, 5대2로 뒤지고 있던 6회초 공격에서 다부치가 자이언츠의 구원 투수 구라타 마코토 (倉田 誠)로 부터 좌측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역전 만루 홈런을 작열시키며 전세를 뒤집고, 이어진 6회말 부터 구원 투입된 에나츠가 오-와 나가시마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호투하여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게 된다.

이 날의 승리로, 한신은 승률에서 요미우리를 1리 차 앞서며 승차 없이 1위로 나서게 되고 마침내 10월 20일, 9년 만의 리그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주니치 드래곤즈의 홈구장인 '나고야 구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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