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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3) 리위안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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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3년 전인 1908년, 후베이 신군 협통 시절 군기대신 인창(蔭昌·왼쪽)과 후일의 민국 총통 쉬스창(徐世昌·왼쪽에서 둘째)의 신군 포병훈련 참관에 수행원으로 참석한 리위안훙(오른쪽). 혁명이 발발하자 인창은 토벌군을 총지휘했다.    [사진 김명호]

신해혁명은 순식간에 세계적인 인물들을 쏟아냈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화민국 총통을 두 차례 역임하게 되는 리위안훙(黎元洪·여원홍)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지독한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리위안훙은 어릴 때부터 밥 구경 하는 날보다는 굶는 날이 더 많았다. 누나와 함께 빈 그릇을 들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정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무밭에서 숨을 죽이곤 했다. 훔치는 방법이 남달랐다. 무를 뽑아낸 후 윗부분은 잘라서 원래 있던 곳에 놓고 자리를 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둑 맞은 표가 나지 않다 보니 주인에게 들키는 법이 없었다.

리위안훙은 군대가 체질에 맞았다. 당시 후베이(湖北) 신군(新軍)에는 총독 장즈퉁(張之洞·장지동)의 초빙을 받은 영국인 고문들이 많았다. 리위안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들을 따라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진급을 거듭하면서 리위안훙은 청나라 황실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하는 짓 치고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뒤집어 엎을 생각은 꿈에서도 감히 해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보황주의자(保皇主義者)였다.

신해혁명은 지도자가 없는 무장폭동이었다. 도시를 점령한 혁명군은 경악했다. 혁명을 부추겼던 사람들은 이미 잡혀서 목이 잘리거나 도망친 후였다. 혁명군 장교들은 지도자 감을 찾아 나섰다. 여단장보다 조금 높은 협통(協統) 리위안훙이 떠올랐다. 혁명과 전혀 상관이 없고 혁명의 주동세력인 후베이 신군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지만 윗대가리들이 다 도망간 마당에 내세울 사람이라곤 리위안훙이 유일했다.

신군 장교들은 첩집 식탁 밑에 숨어 있던 리위안훙을 강제로 끌어냈다. 일설에는 참모의 집 모기장 뒤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후베이 군정부도독(軍政府都督) 취임서와 포고문에 서명하라고 윽박질렀다.

리위안훙은 서명을 거부했다. 협박을 당했든 뭘 했건 서명과 동시에 범상작란(犯上作亂)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불을 보는 듯했다. 범상작란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리위안훙이 끝까지 버티자 성질 급한 장전우(張振武·장진무)가 혁명 포고문 말미에 ‘都督 黎元洪’이라고 대신 써 버리자 리위안훙은 울상을 지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게 그거였다. 결국 군정부 도독직을 수락했다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리위안훙은 완전히 변신했다. 제 손으로 변발(<8FAE>髮)을 잘라 버리고 사병들에게 혁명군 지도자로 손색없는 훈시를 했다. “나는 부덕한 사람이다. 중의를 내치기 힘들어 스스로 운명에 순응키로 했다. 이틀 전까지도 결심을 못했고, 어제도 결심을 못 내렸다. 오늘 오전에도 주저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정했다. 성공과 실패, 운과 불운, 삶과 죽음을 개의치 않겠다.”

모든 성명서가 ‘도독 리위안훙’ 명의로 발표되자 사병들의 사기가 오르고 민심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황제폐하만 노래하던 리위안훙이 혁명군 지도자라면 세상은 완전히 뒤바뀐 거나 다름없었다. 10월 10일 거사에 가담하지 않고 숨어 있던 중소 지휘관들이 제 발로 군정부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대가는 참혹했다. 강제로 혁명군을 지휘하게 됐지만 리위안훙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눈알을 부라리며 혁명 포고문에 대신 서명한 혁명 원훈 장전우를 처형했다. 만주족과 북방 말을 쓰는 사람들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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