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정체성 다룬 스릴러 '콧수염'

중앙일보

입력

아내가 잠시 슈퍼에 간 사이, 10년 가까이 길러온 콧수염을 깨끗이 밀어낸다. 이유는 단 하나. 결혼한 지 5년 된, 사랑하는 아내를 놀래주기 위한 깜짝쇼다.

그런데 웬걸? 집에 돌아온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행동한다. 어라, 역습이네. 오히려 날 골려주겠다 이거지….

소설 『콧수염』은 이렇게 부부간의 장난 같은 이야기로 출발한다.

희멀겋게 된 콧수염 자리에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로션을 발랐다가 따가워하는 주인공.

인텔리 건축가인 그가 아내의 놀라는 모습을 기대하며 허둥지둥 샤워실을 정리하고 시치미 떼는 장면이라든지, 매끈해진 윗입술로 애무를 해도 아내가 무심하자 은근히 화를 내며 "타임(장난 그만)" 을 외치는 장면 쯤에선 "이 프랑스 작가, 별것 아닌 얘길 제법 재밌게 쓰네" 하며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책장 넘기는 손길이 빨라지면서 소설의 전개 국면이 바뀐다.

"콧수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는 아내의 주장, 서로를 정신병자라고 믿게 된 부부의 심리전이 스멀스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로맨틱 코미디' 는 히치콕 감독풍의 '스릴러' 로 바뀐다.

신분증 사진도 콧수염을 길렀었다는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고 친구들과 부모에 대한 기억마저 의심받자 아내가 정부(情夫)와 짜고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임이 틀림없다며 두려움에 떠는 주인공. 충동적으로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지만….

탄탄한 구성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섬뜩한 여운의 마지막 반전 부분에 대한 추리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자, 그런데 주인공에게 콧수염이 정말로 있었는가?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 같지 않다. 콧수염이란 모티브는 안경이나 흉터 등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공포의 서스펜스 속에서 간취되는 것은 뜻밖에도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다.

현대 사회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무관심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그것이 또 인간을 어떻게 파멸의 길로 몰아가는지를 작가는 현실과 몽상의 세계를 적절히 뒤섞으며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1986년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프랑스 권위지인 르몽드로부터 '문학의 천재' '소설의 생리적.심리적 법칙에 도통한 사람' 같다는 평을 들었다는데 수긍이 간다.

김정수 기자 (newslad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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