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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 남·여 소통조건은 '화성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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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오랫동안 꾸준히 팔리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3년 번역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20쇄가 넘게 팔려온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친구미디어.1993)도 그런 책의 하나인 것 같다.

이런 류의 책은 시대의 욕구에 부응하는 바가 있는 책일텐데, 그렇다면 그레이의 책이 테마로 삼고 있는 성차이의 문제, 그리고 남녀간의 소통의 문제가 상당수 우리나라 사람들에서도 꽤 절박한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며,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든 나도 그런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 풍부한 임상사례 잘 요약

이 책의 멋진 제목은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비너스)와 아레스(마르스)의 사랑으로부터 제목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연금술양 하는 이 책은 뜻밖에도 그리스 신화를 그리 풍부하게 활용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사랑이 불륜이어서일까□ 그레이는 미국 백인 중산층 부부의 애정생활을 돕는 책을 쓰면서, 신화이지만 불륜인 사랑에 담긴 표상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듯하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풍부한 임상적 사례를 쉬운 표상들로 요약한 데 있다.

미스터 수리공과 가정진보위원회, 동굴에 들어가는 남자와 이야기하는 여자, 고무줄인 남자와 파도인 여자 등등이 그렇다.

성차이를 인정하는 법, 논쟁을 피하는 법, 사랑의 편지를 쓰는 법, 도움을 청하는 법, 이성에게 점수를 따는 법 따위의 실용적인 처방과 구체적인 테크닉의 제시도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지루하다는 느낌, 그리고 많은 사례에 대해 실용적일 수 있지만, 모든 사례에 대해서 그런 것은 아니며,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책이 무엇보다 개념적으로 불명료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가 화성과 금성을 빌려 말하는 성차이란 내 보기에 강박증 남자와 히스테리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강박증 환자는 타자의 욕망, 타자의 결핍과 만나기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하며,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망친다.

그레이의 표현을 따른다면 남성이 수리공이 되어 즉각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것이 어려울 때 주기적으로 고무줄처럼 멀어졌다가 되돌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비해 히스테리 여성은 타자의 결핍과 욕망을 갈망하며, 그것을 채움으로써 타자를 완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성은 그것이 실패할 때 우물에 빠진 것처럼 침강하며, 그것이 성취될 때 밀도높은 감정으로 솟아오른다.

당연히 남자는 적게 주고 여자는 희생하며, 남자가 적게 주는 것은 그가 이미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만 하면 몇십쪽의 팸플릿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권 분량의 길고 반복되는 이야기로 펼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개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면 그레이의 실용적 지침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강박증과 히스테리는 주체의 심리구조이지 성차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성차이의 절대화에 기초한 그레이의 책은 훨씬 빈도가 적지만 강박증 여성, 그리고 히스테리 남성이 타자와 만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런 지침도 제공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내보기에 그레이가 주는 지침들은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가 제공하는 지침이란 그저 성차이를 인정하고 적절한 대화의 테크닉을 습득하라는 것인데, 그것의 귀결은 상대의 징후, 상대의 질병을 인정하기이며, 상대가 자신의 질병으로부터 계속해서 쾌락을 길어 올릴 길을 열어주는 것일 뿐이다.

사랑이 타자의 히스테리나 강박증 같은 병조차 사랑하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징후는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자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 진정한 문제 해결엔 부족

그러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너무 안전한 타협이며, 타자와의 소통에 너무 일찍 한계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타자와의 소통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레이의 지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그 근본적 한계에서 한참 먼 곳에서 멈춰설 뿐이다.

그것은 안온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것은 한계에 이르려 한다.

타자 안에 있는 근본적 이타성, 타자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어떤 기괴하고 끔찍한 무엇, 그녀의 트라우마와의 조우,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기, 그것이 사랑이 한계에 이르려 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김종엽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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