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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내내 혹독한 인터뷰 심사 … 목에서 피가 나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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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호 12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2달러. 아프리카 수단(104달러)·케냐(95달러)만도 못했다. 그러나 50여 년 만에 1인당 GDP 2만 달러를 넘었다. 무역이 성장의 힘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자유로운 무역체제다. 자국 산업을 살리겠다며 빗장을 거는 보호주의가 판을 쳤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다.

한국인 첫 WTO 상소기구 위원 된 장승화 교수

자유무역에서 세계무역기구(WTO) 내 상소기구는 무엇보다 핵심적인 통상 질서의 수호자다. 전 세계에서 뽑힌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기구는 무역과 관련된 분쟁을 최종 심판한다. 그래서 상소기구 위원은 한 나라의 산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통상 분쟁의 대법관인 셈이다. 이 때문에 WTO 상소기구는 비경제적 분쟁을 재판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 비견되는 권위를 지닌다. 최근 이 자리에 선발돼 출국을 앞둔 장승화(49·사진) 서울대 법대 교수를 4일 만났다.

장 교수는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상소기구 위원 자리가 나라 간 나눠 먹기 식으로 한국에 돌아온 걸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라고 했다. 외교통상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치열한 경쟁 끝에 쟁취했다는 뜻이다. 그는 “한 달간의 혹독한 인터뷰를 거쳐야 했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정말로 목에서 피가 나오더라”며 고됐던 순간을 회상했다. 자신의 배경에 대한 오해를 의식한 듯 그는 “국제기구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하니 나를 영어가 유창한 조기 유학파 출신으로 믿는 이들이 꽤 있지만 실제론 28세 때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늦깎이 유학생 출신”이라고 털어놨다.

-WTO 상소기구 위원이란 어떤 자리인가.
“국가 간에 무역분쟁이 일어나 WTO에 소가 제기되면 분쟁해결기구(Dispute Settlement Body·DSB)에서 이를 판단하고 조정하게 된다. 이때 DSB는 두 번 심판하게 되는데 상소기구(Appellate Body)는 최종심을 맡는다. 따라서 이 기구와 7명의 위원은 WTO의 대법원과 대법관인 셈이다.”

-어떻게 뽑는가.
“절차상으로는 WTO 사무총장과 간부들로 이뤄진 6명의 선정위원회에서 단일 후보를 내면 이를 155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도록 돼 있다. 4년 임기에 한 번 연임이 가능하다. 그런데 선정위원회 결정에 앞서 30여 개 주요국에서 후보자를 따로 불러 개별 인터뷰를 한다. 어떤 인물이 뽑히느냐에 따라 국익이 좌우되는 만큼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증한다. 이 과정에서 부적격자로 찍히면 후보군에서 제외된다. 특히 미국·중국과는 세 번씩, 유럽연합(EU)과는 두 번 개별 인터뷰를 했다. 한 달간 제네바·
워싱턴·브뤼셀을 오가며 많게는 하루에 일곱 번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어떻게 진행됐나.
“대개 제네바에 있는 각국 대사관에서 인터뷰가 이뤄졌지만 EU의 경우 집행위 본부가 있는 브뤼셀로 불렀다. 그곳에서 전문가 11명으로 구성된 패널이 온갖 것을 물었다. 미국도 워싱턴의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수석 법률고문을 비롯해 7명이 심사하러 나왔다. 한 달 내내 혹독한 인터뷰를 하다 보니 목에서 피가 나더라. 목이 아파 나중에는 인터뷰 때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야 했다.”

-경쟁은 없었나.
“그간 상소기구 위원들은 미국·중국 등 무역대국 출신과 각 대륙의 대표성을 고려해 선발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최근까지 미국·EU·중국·인도·멕시코·남아공, 그리고 일본에서 한 자리씩 맡았는데 이 중 일본 위원이 일신상 이유로 퇴임하게 됐다. 일본은 95년 WTO 출범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계속 상소기구 위원직을 차지해 왔다. 이번에도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두 명이나 후보를 냈다. 회원국에 이 중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고르라는 사인인 셈이다. 이들 외에 태국도 후보를 내 3명의 경쟁자와 치열하게 다퉈야 했다.”

-어떤 점이 어필했다고 보나.
“무역대국인 일본의 후보들과 경쟁해야 했기에 ‘나라가 아닌 후보자의 능력을 봐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나는 97년부터 8년간 WTO의 1심 격인 분쟁해결 패널의 위원으로 일했던 실무 경험과 함께 하버드·예일·도쿄대 등 유명 대학에서 통상법 강의를 하는 등 학문적 소양도 갖췄다는 걸 내세웠다. 더불어 상소기구 위원 자리를 염두에 두고 지난 10년간 어떤 정부나 기업의 자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재판관에게 요구되는 독립성을 유지한 점이 큰 인상을 남긴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EU 측 인터뷰 과정에서 ‘종교적 이유 등으로 채식주의를 채택한 한 나라가 육류 수입을 금지했다면 이를 불공정 무역으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우연인지 이 질문은 내가 기말고사 때마다 단골로 내는 문제였다. 그래서 웃으며 사정을 설명하며 상세히 대답했더니 곧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

-이 자리를 원했나.
“사실 이 자리에 오르는 게 오랜 꿈이었다. 오랫동안 이 자리에 꼭 내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무역 규모가 크긴 해도 한국은 국제 무대에서 그리 대우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상소기구 위원으로 잘해서 국격을 높일 수 있다면 앞으로 국제 무대에 진출하려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28세 때 판사를 그만두고 유학 가기 전까지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다. 20대 후반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영어를 썼던 셈이다. 어렸을 적 외국에서 살지 않았더라도 20년간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국제기구의 주요직에 오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장승화 서울대 법대 대학원 졸업.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한 뒤 하버드대로 유학 법학 박사가 됐고 미 조지타운대 조교수를 지냈다. 이후 WTO 패널 위원, 국제중재법정 중재인, 서울대 법대 교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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