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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이상하면 발 의심하라” … 신발·안창·양말이 건강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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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독일 라이프치히 2012 국제 정형?재활기술박람회에서 한 여성이 트레드밀 위를 걷고 있다. 앞에
있는 모니터에는 산길과 자갈길 등 다양한 장소에서 걸을 때마다 변하는 발 압력 영상과 데이터가 나오고 있다. [라이프치히(독일)=허진우 기자]

#1. 올해 런던마라톤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이는 영국 여성 클레어 로마스(32)다. 낙마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그는 생체공학장비를 이용해 16일에 걸쳐 런던마라톤 풀코스(42.195㎞)를 완주하는 감동 드라마를 썼다. 로마스가 착용한 장비 ‘리워크(rewalk)’는 몸의 중심 이동을 컴퓨터 센서로 감지해 적절히 다리를 움직이게 해준다. 아직 목발과 함께 활용해야 하며 느린 걷기만 가능하지만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도 없었던 로마스를 풀코스 완주 마라토너로 만들어줬다.

#2. 2012 런던 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6)도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다. ‘의족 스프린터’로 불리는 피스토리우스는 탄소섬유로 만든 ‘J’자 형태의 의족을 착용하고 세계적인 육상선수들과 경쟁하며 꿈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600m 계주에 참가, 은메달을 따냈다. 장애인 선수 최초의 세계선수권 메달이다.

#3. 지난해 개봉한 영화 ‘페이스 메이커’에서 주인공인 마라토너 주만호(김명민 분)는 오른 다리가 왼쪽보다 1㎝가 짧은 탓에 풀코스를 뛰지 못한다. 올림픽 메달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감독(안성기 분)은 특수제작 신발로 양쪽 균형을 맞춰준다. 30㎞가 한계였던 주인공은 결국 마지막 레이스에서 풀코스를 완주한다.

주부와 어린이를 위한 보정 속옷과 제품들. [라이프치히(독일)=허진우 기자]

정형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정형은 근육이나 뼈 등 운동기관의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정형기구를 의지(義肢)보조기나 휠체어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활동을 도와주는 보조용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의 정형은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막는 예방의 개념으로 진화해 있다.

 그렇게 발전된 기술은 일상생활용품에 적용돼 일반인의 삶의 질 향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지난달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2012 국제 정형-재활기술박람회는 정형기술이 현대인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라이프치히 국제 정형·재활기술박람회에는 전 세계 39개국 537개 업체가 참가했다.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으로

박람회장에서는 절단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의지보조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본인들이 절단 장애인인 영업사원들은 자사의 의지보조기를 착용하고 그 제품에 대한 설명에 열을 올렸다. 계단과 비탈, 트레드밀을 걸으며 부드러운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독일의 절단 장애인 농구팀은 농구 시연과 일반인과의 농구 시합 등으로 제품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피스토리우스

 정작 관심이 쏠린 건 비장애인을 위한 제품이었다. 박람회장 곳곳에 자리한 거대한 신발 안창 구조물, 유아 마네킹이 입은 내의, 형형색색의 스타킹, 스포츠 양말 등은 박람회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부스에 바이어가 더 많이 몰렸다. 모두 실생활에서 신체 변형의 위험을 줄여주는 제품들이었다. 아인라게(Einlage, 영어식 표현은 인솔·Insole)라고 불리는 신발 맞춤 안창은 발에 집중되는 압력을 분산시켜 발과 발목 변형을 막는다. 일반용과 정형용, 당뇨용, 스포츠용 등 세분화된 맞춤 안창은 전문가들이 양발의 입체 형태와 족압 분포도를 분석해 사람별로 높낮이와 소재까지 따로 제작한다. 스타킹과 양말은 독특한 패턴으로 근육을 압박해 준다. 운동선수들이 붙이는 테이핑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또 유아용 내의는 덜 발달된 뼈와 근육, 인대 등 성장속도의 차이로 인해 신체 구조가 변형되는 것을 막아 준다. 자연스럽게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해 성장에도 도움을 준다.

 주부들이 집안일을 하다 무리하게 근육을 사용해 다치거나 통증을 키우는 것을 막는 허리벨트나 보정속옷 등 신체 안정성 유지 제품도 많았다. 이미 유럽의 정형산업은 생활밀착형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바르게 서야 바르게 산다

발 모양과 족압 분포도를 측정하는 모습(왼쪽). 하이힐 착용으로 양 발바닥 앞쪽과 엄지발가락 부위에 몰렸던 압력(오른쪽 위)이 맞춤 안창 사용 뒤 발 전체로 분산됐다. 검정→파랑→하늘→연두→노랑→빨강→분홍으로 갈수록 높은 압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워킹온더클라우드]

박람회에 참여한 537개 업체 중 300여 개가 독일 회사다.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형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다양한 산업으로 영역 확장에 나서고 있다. 15년 전부터 생활용품들에 정형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10여 년 전에는 레저 분야에도 관심을 뒀다. 박람회장에서 본 기능성 양말은 겨울스포츠용, 아웃도어용, 골프용 등으로 세분화돼 있었다. 활동에 따라 힘의 분산 정도가 조금씩 달라 부상 예방을 위한 최적의 형태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축구할 때 축구화를, 골프할 때 골프화를 신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9년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바이애슬론월드컵 여자 10㎞ 추적에서 우승한 헬레나 에크호름(스웨덴)은 맞춤 안창을 후원받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 등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선수들도 축구 전용 맞춤 안창이나 양말을 쓰고 있다.

 전문선수뿐 아니라 일반인도 정형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자연스럽게 쓴다. 독일에서는 정형제품을 쓰는 게 건강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그들에게 정형제품을 쓰는 일은 안경점을 찾아 안경을 맞추는 것과 같다. 국가에서도 정형제품 가격의 90%를 건강보험으로 지원한다.

 특히 독일은 발에 집중하고 있다. 박람회에는 신발 맞춤 안창, 기능성 신발, 양말, 스타킹, 풋크림 등 발 관련 제품 회사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 사람은 두 다리로 서기 때문에 신체 균형을 위해서는 바르게 서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해서다. 발의 균형이 무너지면 발목→무릎→허리→등→어깨→목→머리까지 차례로 악영향을 미쳐 오십견이나 디스크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독일의 기능성 신발 및 맞춤 안창 제작업체 대표인 샤인은 “목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프다면 발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바르게 서거나 걷지 못하면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통증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사람마다 서는 법, 걷는 법, 뛰는 법이 모두 다르다. 바른 습관을 갖지 못했다면 바르게 서고, 걷고, 뛸 수 있게 도와주는 보조기구를 사용해 몸의 균형을 바로잡는 건 건강을 위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척추 보호기구 모태는 코르셋

독일 등 유럽도 초기에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보조기 제작이 주를 이뤘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이 최고 정형기술을 보유하게 된 건 지우고 싶은 과거 때문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형기술이 급속히 발달했다. 지뢰가 본격 사용된 2차대전은 1차대전과 달리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당시 세계 최고로 꼽히던 독일의 과학기술이 정형을 위해 쓰이면서 빠른 발전을 이뤘다. 중세시대 여성을 구속했던 코르셋 제작을 통한 허리와 등, 엉덩이에 대한 이해는 현재 몸의 균형을 잡는 허리벨트와 척추 보호기구 제작에 도움이 됐다.

 독일인 특유의 장인정신도 성장 자양분이다. 샤인은 “증조할아버지가 회사를 창립할 때 모토가 ‘No-No(고객의 요청에 안 되는 건 없다)’였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일일이 제품에 반영하겠다’는 정신은 133년의 회사 역사 내내 이어져 왔다”고 했다. 독일에는 4개의 맞춤 신발 장인양성학교가 있고 매년 35명 정도의 졸업생을 낸다. 이들은 최소 9년의 현장 경험과 교육을 거쳐 독일 정부로부터 슈마이스터(구두장인) 자격을 얻는다. 그만큼 철저한 교육과 관리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사용한 것이 정형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걷기 열풍으로 기능성 신발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있으나 아직 맞춤형 제품에 대한 인지도는 낮다. 오히려 전문가의 도움 없이 무분별한 제품 사용으로 신체 밸런스를 망가뜨리는 일이 생긴다.

 36년 경력의 독일인 슈마이스터로 한국의 기능성 신발과 맞춤 안창 제작전문업체 워킹온더클라우드에서 일하는 에발트 쉐퍼(53)는 “한국사람들은 맞춤 안창을 몸에 이상이 있을 때만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사람의 발모양은 모두 다르다. 신체골격과 자세에 따라 압력이 달라서다. 그래서 맞춤 안창이 중요하다. 독일에서는 국민의 약 70%가 기능성 신발이나 맞춤 안창을 쓴다. 하나의 맞춤 안창으로 구두나 운동화를 기능성 신발로 바꿔 쓰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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