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LB] 명예의 전당 (22) - 에디 매슈스 (2)

중앙일보

입력

매슈스는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삼진을 당했고, 수비에서도 그리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팬들은 엘리엇을 내보낸 팀의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타석에서 그가 갖는 문제점은 몸 쪽으로 들어오는 높은 공을 공략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그는 클로즈드 스탠스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타격 자세를 오픈 스탠스로 교정했다. 그러자 그의 타력은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역대 신인 중 최고 기록인 25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1952 시즌을 마친 뒤, 브레이브스는 연고지를 보스턴에서 위스컨신 주 밀워키로 옮겼다. 아메리칸 리그의 초창기 멤버였던 밀워키 브루어스(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세인트루이스로 떠난 뒤, 이 지역에 빅 리그 팀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매슈스는 새 연고지에서 맞은 첫 해인 1953년에, 시즌 중반까지 베이브 루스의 시즌 60홈런 기록을 경신할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결국 시즌 막판의 슬럼프로 이는 무위에 그쳤으나, 그는 47개의 홈런을 날려 당시까지 내셔널 리그에서 홈런왕 자리를 빼앗겨 본 일이 없는 인물이었던 랠프 카이너를 끌어내리고 처음으로 이 부문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

또한 그가 원정 경기에서 기록한 30홈런은 내셔널 리그 신기록이었다. 그는 이 해에 자신의 생애 최고 기록인 135타점을 기록하였으며, 올스타전 신인 내야수 최연소 선발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기자단은 이 해의 내셔널 리그 MVP투표에서 그를 브루클린 다저스의 로이 캄파넬라에 이어 2위에 올렸다.

그러나, 밀워키 시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매슈스에게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메이저 리그와는 동떨어져 있던 밀워키 팬들은 지나칠 만큼 선수들에게 열광하였고, 내성적이고 무뚝뚝하면서 거친 성품의 소유자였던 매슈스는 팬들의 지나친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보스턴 같은 대도시에서는 매슈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밀워키는 보스턴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은 도시였고, 매슈스의 일거수 일투족은 팬들에게 그대로 알려졌다. 보스턴에서도 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매슈스는 밀워키에서는 더욱 언론을 혐오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매슈스와 밀워키 언론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절친한 사이였던 투수 밥 불의 집에 들른 뒤, 새벽에 차를 몰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경찰이 그를 과속 운전을 이유로 추격하자 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연행되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거짓말을 하여 책임을 회피하려 했으나,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50달러가 넘는 벌금을 물었다. 그리고 그는 법정에서 나오면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진 기자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위협을 가했다. 지역 신문이 그를 도마 위에 올린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구나 이 해에 시즌 중 그의 부친은 위독한 상태에 빠졌고, 매슈스는 팀을 떠나 가족들이 있는 캘리포니아의 샌터 바버러로 가야 했다. 부친이 사망하고 그가 팀에 복귀했을 때, 그는 전체 시즌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16경기에 결장한 상태였다.

결국 그는 이 해에 홈런왕 2연패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40홈런과 103타점은 그의 장타력이 여전함을 입증해 보였다. 또한 수비 불안 때문에 자주 지적받던 그는 이 해에 리그에서 3루수로서는 가장 높은 수비율을 기록하여, 브레이브스의 '핫 코너'가 구멍이라는 우려를 잠재웠다.

이 해에 브레이브스에는 장차 야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선명히 새길 또 하나의 젊은 스타가 나타났다. 부상당한 바비 톰슨을 대신하여 빅 리그에서 활동하게 된 행크 에런은 이 해에 13홈런을 날렸고, 이는 내셔널 리그 역사상 최강의 홈런 듀오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매슈스는 1955년에 시즌 초반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41홈런을 날렸으며, 이듬해에는 37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두 해에 브레이브스는 리그 우승에 강력히 도전하였으나, 내셔널 리그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다저스는 계속 브레이브스를 좌절시켰다.

1957년, 브레이브스는 매슈스와 에런이 주축이 된 타선과 워런 스판, 루 버데트 등이 포함된 투수진을 앞세워 95승을 올리며 다저스를 끌어내리고 리그 정상에 올랐다.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미키 맨틀과 요기 베라, 화이티 포드 등을 앞세운 막강 전력의 뉴욕 양키스였다.

매슈스는 4차전에서 연장 10회에 홈런을 날려 시리즈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5차전에서는 내야 안타로 출루한 뒤 경기의 유일한 득점을 올려 팀을 앞서가게 했다. 특히 5차전에서 그가 날린 안타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볼을 잡은 제리 콜먼은 매슈스가 발이 느린 선수라고 생각하고 여유 있게 송구했으나, 사실 매슈스는 타석에서 1루까지 3.5초만에 달려가는 준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졌고, 브레이브스가 5-0으로 리드한 가운데 양키스는 9회에 2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타석에 들어선 빌 "무스" 스코런은 3루 쪽으로 강한 타구를 날렸고, 순간적으로 이는 라인을 따라 흐르는 장타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매슈스는 총알 같은 타구를 절묘하게 잡아내어 3루를 태그함으로써 시리즈를 끝냈다. 브레이브스는 서로 다른 두 도시에 모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선사한 첫 팀이 되었다.

이듬해에도 에런과 매슈스의 파워는 여전하였고, 브레이브스는 리그 2연패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양키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 두 팀은 또다시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슈스는 이 시리즈에서 부진을 보였고, 결국 3승 1패로 앞서가던 브레이브스는 내리 3경기를 내주어 무릎을 꿇었다.

1959년, 매슈스는 46홈런을 쳐내어 홈런왕 자리에 복귀하였다. 또한 114타점을 올렸으며, 생애 2번째로 3할 타자가 되었다. 그러나 브레이브스는 LA로 연고지를 옮긴 다저스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리그 정상을 양보해야 했고, 이후 1991년까지 월드 시리즈와 인연을 맺지 못하였다.

이후 매슈스는 1960년과 1961년에 계속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여, 9시즌 연속 30홈런 달성의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당시까지 이와 같은 기록을 보유한 타자는 지미 팍스(12년 연속)와 루 게릭(9년 연속)뿐이었으며, 내셔널 리그에서는 전무하였다.

그러나 1962년, 그에게 불운이 찾아왔다. 그는 신생팀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스(현재의 애스트로스)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투수 터크 패럴의 공을 파울로 걷어내는 순간,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그의 어깨 인대가 손상된 것이다.

결국 그는 몇 주 동안 결장해야 했다. 그리고 복귀한 뒤, 그는 인대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른팔을 몸에 가능한 한 붙인 상태에서 스윙을 하려 하였다. 이는 자연스러운 폼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후에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상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리고 회복된 뒤, 나는 자기 방어에 급급한 타자로 변했고 좋지 않은 타격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1962 시즌에 29홈런에 그쳐, 팍스만이 보유하고 있던 12년 연속 30홈런의 대기록을 경신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리고 다음 두 시즌에는 연속으로 23홈런에 그쳤으며, 1965년에 생애 마지막 30홈런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하향세도 대기록 수립을 막지는 못했다. 1965년 8월 20일 매슈스는 시즌 28호 홈런을 기록하였고, 이것은 에런이 브레이브스의 빅 리그 팀에 합류한 후 형성된 매슈스-에런 콤비의 통산 794호 홈런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을 제치고 역사상 한 팀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낸 듀오가 되었다.

1965시즌 후 브레이브스는 연고지를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로 옮겼다. 그리하여 매슈스는 한 팀에 몸담고 있는 기간 중에 서로 다른 세 도시에서 활동하는 진기록을 남겼다(에런도 보스턴 시절에 입단하였으나, 그가 빅 리그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밀워키 시절이었다).

1966년 그는 노쇠 기미를 역력히 드러내었고, 결국 브레이브스는 그를 포기하였다. 그는 팀으로부터 아무런 사전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밥 브루스와 데이브 니컬슨, 아니 움바크 등의 선수들과 트레이드되어 애스트로스로 가게 되었다. 훗날 그는 "나는 그 때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라고 회상하였다.

휴스턴에서 그는 주로 1루수로 출장하였으나, 나이와 구장의 여건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된 것은, 7월 14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에이스 후안 마리칼을 상대하여 날린 통산 500호 홈런이었다.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7번째, 내셔널 리그 역사상 3번째로 이 위업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매슈스는 그 다음 달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주로 대타로 기용되였다. 그러나 1968년에 타이거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격파하였고, 이로써 매슈스는 생애 마지막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는 행운을 차지하였다.

1968시즌을 끝으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은 뒤, 그는 1971년부터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를 맡았다. 그리고 1972년 8월, 브레이브스는 루먼 해리스 감독을 해임하고 매슈스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1974년 4월 8일 에런은 715호 홈런을 기록하여 역사상 최다 홈런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때 그의 동료였던 매슈스는 팀 감독으로서 그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에런과 함께 브레이브스를 이끌었던 인물인 그에게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슈스는 1974 시즌 중반에 감독 자리를 클라이드 킹에게 넘겨 주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처음으로 BBWAA(전미 야구 기자 협회)의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 후보로 올랐으나,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BBWAA가 생애 통산 512홈런을 기록한 이 위대한 슬러거를 쿠퍼스타운으로 인도하기까지는 어이없을 만큼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는 1978년에 결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헌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5번이나 투표를 거친 끝에 헌액되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성적표를 남긴 어니 뱅크스는 자격을 얻은 첫 해에 쿠퍼스타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는 약간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헌액되었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드윈 리 매슈스(Edwin Lee Mathews)

- 포지션 : 3루수
- 1931년 텍사스 주 텍서커너에서 출생
- 우투좌타
- 1952~1966년 보스턴-밀워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196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 1967~196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통산 성적 : 타율 .271, 512홈런, 1453타점, 2315안타
- 명예의 전당 헌액 : 1978년 (BBWAA)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