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독일 해적당의 ‘투명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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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성우
사회부문 기자

노란 두건을 쓰고 광대 복장을 한 게르발트 클라우스(40)를 만난 순간 이벤트 회사에서 나온 사람인 줄 알았다. 19세기 프로이센 왕국 때부터 의회로 쓰였던 웅장한 바로크 건물 안에 그가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니 코미디 같았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 주의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된 해적당 소속 의원이다. 해적당은 지난달 13일 독일 최대 주(州)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도 7.8%를 득표해 20석을 얻으면서 확고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해적당을 컴퓨터 폐인과 괴짜들의 정체 모를 집합체라고 비아냥대던 독일 기성 정치권은 연정(聯政) 구성 전략을 재검토하는 등 심각해졌다.

 독일 해적당의 급부상은 기존 정당들에 실망해 신생·군소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세계적인 ‘항의 투표(protest vote)’ 추세와 비슷한 맥락이다. 국가 재정이 파탄 난 그리스에서는 긴축 정책에 반발하는 포퓰리스트 극좌 정당이 득세했다. 올해 4월 프랑스 대선에서도 경제 침체를 외국인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극우 정당이 사상 최대 득표율을 올렸다. 해적당이 이들과 다른 건 억지와 편견 대신 ‘투명한 정치’라는 합리적인 어젠다를 내걸어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상의 모든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하자며 불법 다운로드를 옹호해 붙은 이름이 ‘해적(piracy)’. 하지만 해적당에 인터넷은 도구일 뿐 궁극적인 지향점은 국민이 원하는 바를 직접 듣고 정파적 이해관계나 이념의 잣대에 희석됨 없이 그대로 실행에 옮기자는 것이다. 기본소득 보장·무상 대중교통 등의 정책을 보면 진보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각종 규제 철폐를 외치는 해적당의 모습은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에 가까워 보였다.

 해적당 돌풍의 최대 피해자는 그동안 독일의 2030세대가 지지해 왔던 녹색당이다. 지난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선거에선 8만여 명이 녹색당에서 해적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꾼 것으로 출구조사 결과 나타났다. 처음 투표하는 18세 유권자 3만여 명과 태어나서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던 7만여 명도 모두 해적당에 몰렸다. 1980년 창당한 대표적 진보정당인 녹색당은 30여 년이 지나면서 낡은 이념과 구태 정치에 매몰돼 젊은이들의 마음이 떠나가고 있다. 인터넷, 소통, 민생, 상식으로 무장한 해적당이 도그마에 젖은 녹색당의 지지층을 강력하게 흡인해 간 것이다. 총학생회나 운동권 동아리에서 배운 철 지난 이념과 투쟁 방식만을 진보라고 믿는 동굴 속의 우리나라 진보진영 일각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