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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세상보기] `잡종적` 지식인의 필요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技術)사회는 복잡하고 위험한 세상이다.

세상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지표가 있다.

1830년께 미국에서 이윤을 제일 많이 남기고 가장 많은 지국을 둔 회사가 미 연방은행이었는데, 당시 이 은행의 본점은 불과 3명의 직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미국 워싱턴의 입법.사법.행정부에 고용된 공무원은 총 6백65명에 불과했다. 미국의 예지만 지금과 비교해보면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다.

왜 세상이 복잡해졌는가□ 급속한 산업화가 한 가지 이유다. 많은 산업국가들이 지난 1백50년 동안 90%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던 농업사회에서 90%의 인구가 농업 외의 일을 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역사학자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20세기는 계층으로서 `농민` 이 사라진 세기였다.

세상이 복잡해진 또 다른 이유는 기술 덕분이다. 사람들은 전기.통신.자동차.고속도로.컴퓨터.원자력.생명공학과 같은 기술을 발전시켰다.

기술은 복잡해지는 세상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발전했지만, 기술 자체가 거대한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이루면서 세상을 몇백 배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진 세상을 다루기 위해 또 다시 인터넷 같은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기술과 사회는 이렇게 물고 물리면서 통제하기 힘든 속도로 급속하게 세상의 복잡성을 증대시켰다.

복잡한 세상을 다루기 위해 발달한 한 가지 제도가 관료제다. 관료제의 핵심은 복잡한 인간사를 세분하고 세분된 단위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한 규정을 미리 정해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를 사전에 없애는 방법이다.

관료제의 폐단은 책임을 회피하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나치 정권아래서 유대인의 학살에 관여했던 한 관료는 자신의 죄가 열차의 운행을 효율적으로 관리한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그 열차에 가스실로 보내는 유대인을 태우는지, 혹은 목재를 수송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는 것이었다.

복잡한 기술시스템과 관료제가 결합해 낳은 것이 지금의 `위험사회` 다. 전문가들이 이해하고 통제하는 것은 세상의 작은 부분에 국한된다. 누구도 전체를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사회는 대체 어디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예측하는 것 자체를 불허한다.

기술자와 관료들은 자꾸 새로운 기술시스템을 만드는 데만 열중하며, 이 과정에서 사고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생기면 그 뒤치다꺼리는 또 다른 기술자나 관료가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책임은 실종되며, 사람들의 불안은 가중된다.

복잡하고 위험한 기술사회를 헤쳐 나가는 지식인이 갖출 조건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위험사회에 필요한 지식인은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세분된 단위만이 아니라 그 단위들의 연결을 이루는 원리와 룰의 타당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인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식인들 사이의 열린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 지식인들과 지식생산에 종사하는 `지식노동자` 와의 연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위험사회의 지식인은 기술의 힘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이보그` 여야 한다. 컴퓨터와 통신기술, 사이버네틱스는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권력의 작동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

경계를 뛰어넘어 연관을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이러한 주체들의 유연한 네트워크, 그 위에 중첩돼 있는 이론과 실천의 연대, 그리고 이 복잡한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해주는 기술적인 결합. 이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잡종적` 지식인의 필요조건이며, 위험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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