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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7년식 노장들의 질주 본능…움직이는스포츠카 박물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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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오래된 자동차들만의 경주인 밀레 밀리아 경기가 열리는 이탈리아 브레샤 시의 두오모 광장에 모인 올드카들

그것은 움직이는 스포츠카 박물관이었다. 운전하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역사적인 자동차 경기에 참가한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1927년부터 57년까지 30년 동안 제작된 스포츠카 375대까지만 참여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의 빈티지 카 경주 밀레 밀리아(1000 Miglia) 얘기다. 올해는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간 열렸다. 그 현장을 다녀왔다.

밀레 밀리아의 전설은 1926년 말 시작됐다. 자동차와 자동차 경주에 열정을 가졌던 네 명의 이탈리아 젊은이(아이모 마지 백작과 그의 친구 프랑코 마조티 백작, 렌조 카스타녜토, 스포츠 신문 기자 조반니 카네스트리니)가 고향인 브레샤부터 로마를 왕복하는 1600km의 일반 도로 ‘스피드 경주’를 기획한 것이다.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던 마조티 백작은 1600km가 1000마일이라는 점에 착안해 경기 이름을 ‘밀레(1000) 밀리아(Miglia·이탈리아어로 마일)’로 붙였다. 일반 도로에서의 자동차 경주는 위험성과 소음, 먼지 등의 측면에서 부정적이었지만, 당시 무솔리니는 대단한 스포츠광이자 드라이버였고 파시스트당의 당수이자 서기장이었던 아우구스토 투라티는 경주를 허가했다.

경주의 대흥행에 힘입어 27년 3월 26일 첫 공식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관중석 충돌 사고 및 전쟁 등으로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다. 결국 스피드 경기 대신 정해진 시간에 가장 정확하게 왕복하는 차가 우승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올드카만 참여하는 만큼 93년부터 전자기기의 사용은 금지됐고 수동 스톱워치의 사용이 의무화됐다.밀레 밀리아에 참여하는 차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정된다. 이 중에는 오스카(OSCA)나 오엠(OM), 스탄겔리니(Stanguellini) 등 경기 초반에 우승한 모델이지만 생산 중단된 차들도 있다. 밀레 밀리아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알파 로메오, 스포츠카의 여왕 페라리, 최고 스피드를 자랑하는 메르세데스 벤츠(1955년 스털링 모스가 SLR을 타고 10시간7분48초의 기록을 세웠다), 재규어, 1940년 평균시속 166.7km의 신기록을 낸 BMW, 50년대 중반부터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르셰, 그리고 이탈리아의 국민차 피아트 등은 밀레 밀리아의 주인공들이다.

5월 15일에는 이번 경기에 참석하는 375대의 올드카들이 밀레 밀리아의 공식 로고(가장자리 회살표와 밀레 밀리아 글씨)를 만들어 기네스북에 올랐다.
전설적인 빈티지 카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17일 새벽 밀라노에서 베네치아행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브레샤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자동차 매니어들로 거리는 활기찼다. 길거리에는 밀레 밀리아의 로고와 스폰서 로고가 프린트된 깃발이 꽂혀 있었다. 가게 진열장도 밀레 밀리아 행사에 관련된 상품이나 그림 등으로 잔뜩 장식돼 있었다.

메인 및 공식 스폰서들은 광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참가자들과 초대손님들에게 휴식 장소를 마련했다. 매년 월드 스폰서로 참여하는 스위스의 주얼리-시계 브랜드 쇼파드는 모든 드라이버에게 4000유로(약 600만원) 상당의 시계를 선물했고, 유명 남성 패션 브랜드 스테파노 리치는 점퍼와 장갑 등을 선물했다.
경기 전 등록된 자동차들은 1000마일을 잘 달릴 수 있는지 엔진과 기타 장비를 미리 점검받고 출발 당일 아침에는 인증 이벤트에 참여한다.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올드카들은 쉴 새 없이 들어왔고 광장 가장자리는 구경 온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차를 몰고 광장으로 들어오는 드라이버들의 표정은 자부심으로 가득했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인증을 받은 드라이버들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엔진소리를 붕붕거리며 출전을 준비했다. 자동차 매니어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곳곳에 주차된 올드카들을 구경하며 드라이버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오후 4시, 모든 참가자가 브레샤의 밀레 밀리아 박물관에 집결했다. 피아트 자누시 폰테바소(FIAT Zanussi Fontebasso MM)를 몰고 참가한 이탈리아 드라이버 코라도 미누에게 참가 소감을 물었다. “올드카를 모는 것은 지난 역사와 문화를 되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올드카를 운전할 때 느끼는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게다가 밀레 밀리아에 참여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올드카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저는 우승을 하느냐 마느냐에 상관 없이 이 경기에 참여했다는 자체를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밀레 밀리아 경기에는 유럽 자동차 회사들의 대표들도 대거 참여했다. 피아트 회장 존 필립 엘칸은 코 파일럿을 맡은 부인 라비니아 보로메오와 함께 1952년에서 1954년 사이 제작된 피아트 8V를 타고 나왔다. 독일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보유한 독일 다임러 그룹의 디터 제체 회장이 1954년형 메르세데스 벤츠 300 SL W198-I에 탑승했다. 포르셰 AG 최고경영자 마티아스 뮐러, BMW 이탈리아의 프란츠 융, 영국 재규어 브랜드 디렉터 아드리안 홀마크 등의 얼굴도 보였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경쟁도 뜨거웠다. 독일 아우디 수석 디자이너 울프강 에거와 이탈디자인의 공동회장 파브리지오 주지아로가 함께 334번 차에 탑승했다. 자가토 디자인의 안드레아 자가토, 그리고 브레이크 제작으로 유명한 브렘보(Brembo) 회사의 회장 알베르토 봄바세이도 281번을 달고 참여했다. 페라리의 대표 루카 디 몬테제몰로는 경기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반환점인 로마에서 참가자들과 인사했다.

오후 6시30분, 코르소 베네치에서 밀레 밀리아에 참여한 올드카들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차들은 번호 순으로 한 대씩 약간 높이 설치된 단 위에 잠시 올라갔다가 출발했다. 3일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2012년 밀레 밀리아 우승컵은 1933년형 알파 로메오 6C 1500을 타고 경기에 참여한 아르헨티나의 클라우디오 스칼리제와 다니엘 클라라문트가 차지했다.

브레샤(이탈리아) 글·사진 김성희 중앙SUNDAY 매거진 유럽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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