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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신 어땠길래…여배우 남편이 감독 고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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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영화에서 키스를 자주 한다고 한국 영화에서도 이성끼리 만나면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1956년 11월 한국일보에 실린 한 칼럼의 주장이다. 영화 ‘자유부인’에 관한 얘기였다. 당시 영화 속 남녀관계 묘사에 대한 사회통념이 어땠는지가 짐작된다. ‘자유부인’은 교수 부인과 대학생의 키스·포옹 장면이 윤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격렬한 논란에 휘말렸다. 결국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애정 묘사 장면이 대폭 잘려나간 채 상영됐다.
한국 영화에 키스 장면이 처음 등장한 건 이보다 2년 전인 ‘운명의 손’(1954)에서다. 말이 키스지 죽어가는 여간첩 입술에 방첩대 장교가 몇 초간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배우(윤인자)의 남편이 화가 나 감독을 고소하겠다고 펄펄 뛰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긴 여배우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장면이 아침 밥상머리 화제가 됐던 시절이었다(1956, ‘그 여자의 일생’). 본격적인 베드신이 처음 들어간 건 65년 나온 ‘춘몽’이다. 남녀가 마취 상태에서 정사를 벌인다는 초현실적인 설정이었다. 연출자 유현목 감독은 음화(淫畵)제조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곤욕을 치렀다.

70년대는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호스티스 영화가 주를 이뤘다. 여주인공의 직업상 에로틱한 설정은 빠지지 않았지만 가슴을 드러내는 식의 과감한 묘사는 아직 불가능했다.

신체 노출이 들어간 에로물이 본격 등장한 건 80년대부터다. 교복자율화와 통금해제, 심야영화 상영 등이 실시됐던 82년이 원년(元年)격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3S(스크린·스포츠·섹스)’를 장려했다. 답답한 시대 분위기도 에로물 소비를 부추겼다. 글래머 배우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이 30만 명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하자 ‘뽕’ ‘어우동’ ‘변강쇠’ ‘산딸기’ 등 에로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시대물과 접목한 토속에로물이 인기를 끌었다.

87년 민주화 직후 에로물 제작은 절정에 달한다. 영화평론가 김형석씨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88년은 매달 1편씩 나올 정도로 양적 팽창이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베드신은 영화 흥행을 위한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파리애마’ ‘집시애마’ 등 이국적 분위기를 내기 위해 해외촬영을 시도하는 에로물도 나왔다. 물론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들도 있었다.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하명중 감독의 ‘땡볕’ 등이다. 에로영화 붐은 무분별한 여배우 벗기기로 저질 시비에 휘말렸다가 90년대 에로비디오 시장으로 잠시 이어진 뒤 사그라들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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