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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과학관의 반역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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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며 고체물리학계의 대부인 필립 앤더슨(78, 미 프린스턴대 교수) 은 72년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많은 것은 다르다(More is different) 」라는 짤막한 글을 발표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은 20세기가 원자물리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생명과학, 나노(nano) 과학, 복잡계과학의 시대라는 것을 예고한 ''반란'' 의 서곡이었다.

그는 여기서 근본 물질과 힘을 연구하는 소립자물리학이 통일 이론을 완성하면 자연과학의 모든 부분이 통일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소립자물리학 분야는 은연중 우주의 모든 물질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과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이해하면 우주 만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소립자물리학 이외에 고체물리학 같은 과학들도 각기 ''근본적인'' 법칙과 존재론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생명과학, 나노과학, 복잡계 과학 등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런 실용적인 응용 가능성을 무기로 자신들도 나름대로 근본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20세기 내내 전통적 과학관은 끊임없는 도전을 받았다.

과학적 지식은 종교나 인문사회과학과 달리 객관적이고 실증적이라는, 과학혁명기 이후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테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가치 중립과 객관성이라는 난공불락의 성 안에 과학이 안주할 없게 된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20세기 전반기에 과학계를 지배했던 원자물리학과 소립자물리학이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해 가는 반면, 복합적인 현상을 다루며 국소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생명현상, 나노세계, 복잡계 분야들이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통일과학의 이념도 그 추진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생명과학이나 나노테크놀로지 등이 각광을 받으면서 원자물리학의 바탕을 이뤘던 전통적 과학관은 확고부동한 지위를 유지하기가 힘들게 된 것이다.

모든 지식을 경험이라는 기반 위에 세우려던 전통적 과학철학도 혁명적으로 변화한 과학 이론과 인식론적 다원성 등으로 무장한 새 세대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여기에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가세했고, 급기야 각 분야를 해체해서 탐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과학관이 등장하여 전통적 과학관의 학문적 질서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이 모든 거역을 이끈 핵심 주동자가 바로 토머스 쿤, 데이비드 블루어, 필립 앤더슨, 피터 갤리슨 등이었는데, 이 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전통적 과학관을 거역하는 동맹자의 역할을 했다.

우선 쿤(1922~96, 미 버클리대.프린스턴대.MIT 교수를 역임한 과학사상가) 은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객관적 지식의 축적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의 내용이나 방향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 같은 비합리적 요소도 개입할 수 있고, 패러다임의 변환을 통해 혁명적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누적적 과학 발전 모형에 일침을 가했다.

쿤의 새로운 과학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진리를 인정하는 상대주의적 측면이 잠재해 있는데, 이런 요소는 사회구성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구성주의란 과학적 사실들이 유연성을 지니며 자연이 제시한 증거들은 동시에 여러 개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관찰 혹은 실험 데이터에 의해 결정될 수 없고, 논쟁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회적 이해관계라고 보는 입장이다.

결국 이들은 객관성의 중추이자 마지막 보루인 과학 지식조차도 ''사회적으로 구성''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 과학관에 대한 엄청난 반역을 도모했던 것이다.

사회구성주의는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데이비드 블루어.배리 반스.스티븐 셰이핀, 그리고 바스 대학의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등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추진된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발전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지나치게 사회적인 시각에서만 파악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과학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논의를 크게 확대함으로써 전통적 과학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반(反) 환원주의의 기수라면 45세의 나이로 현재 하버드 대학의 과학사학과를 이끌고 있는 피터 갤리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진행된 대부분의 과학 논의들이 경험, 이론, 사회적 이해관계 등 어느 한 가지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실험.이론.실험기구 등이 각기 부분적으로 자율적 구조를 지니며 꽈배기처럼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유연한 과학 모형을 제시했다.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탈경험주의 과학관의 공격, 사회구성주의 과학관의 도전, 국소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반환원주의 과학관의 부각, 객관성의 마지막 보루인 과학 분야까지 파고든 포스트모더니즘의 침공, 나노과학과 생명과학 등 복잡계 과학의 부상 등은 모두 20세기 전통 과학관에 반기(反旗) 를 들며 거역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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