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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이 도화선 … 강력범 45%는 가해자 16%는 피해자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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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무기수로 복역 중인 신모(34)씨.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어머니가 여러 번 유산 끝에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통에 무단결석이 잦아졌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21세 때는 특수강도로 구속돼 2년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아버지 사업 부도에 어머니 암 투병까지 겹쳐 우울증 증세를 보이던 신씨는 2009년 말 택시기사를 아무 이유 없이 흉기로 16곳을 찔러 살해했다.

 본지 탐사팀이 수원지방법원에서 최근 3년간(2009~2011년) 살인·강도·성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강력범죄자 159명의 ‘양형조사보고서’를 통해 학창 시절을 분석한 결과 신씨처럼 비행 또래와 어울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강력범죄자는 44.9%로 조사됐다. 7일 이상의 무단결석(46.2%), 집단 따돌림(15.7%), 3회 이상의 가출(19.0%), 학교생활 부적응(44.8%) 등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강력범죄자는 67.2%였다. 붕괴된 가정의 안전망 역할을 해야 할 학교에서도 범죄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절반 이상이 고교 졸업 못해=강력범죄자 중에선 중졸 학력을 지닌 사람이 40.8%로 가장 많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했거나 중퇴한 이들까지 합치면 59.9%다. 강력범죄자 10명 중 6명이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학업을 중단한 셈이다. 전영실 형사정책연구원 예방처우연구센터장은 “학교를 일찍 떠난 이들은 거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고 범죄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고 말했다.

 반면 강력범죄자들의 부모는 고졸(42.9%)이 가장 많았다. 대졸도 14.3%를 차지했다. 이수정(범죄심리학) 경기대 교수는 “부모세대 때는 아무리 못살아도 자식만은 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던 반면 최근에는 가정의 붕괴로 부모마저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을 방치해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교폭력 피해자도 위험=학교폭력 가해자는 물론이고 피해자도 강력범죄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적잖다. 강력범죄자 중 비행집단과 어울려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44.9%, 집단따돌림 피해를 보았던 경우는 15.7%로 조사됐다. 김모(27)씨는 중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했다. 쉬는 시간마다 같은 반 학생들이 싸움을 걸어와 아예 교실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아이들과 싸워도 맞을 정도로 순한 성격 때문이었다. 김씨는 2010년 PC방에서 초등학생 돈을 빼앗고 성추행한 혐의로 붙잡혔다.

 이 교수는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비행 또래와 어울리면서 범죄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의 경우도 부모·주변 친구의 도움으로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성인이 된 뒤 자기보다 약한 이를 대상으로 가해자가 되곤 한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성범죄자 중 39.4%는 미성년자다. 이들은 성인범과 다른 특징을 지녔다. 비행집단과 어울렸던 경우가 60%로 유난히 높았다. 성인 성범죄자는 10%에 불과하다. 이창무(경찰행정학) 한남대 교수는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을 괴롭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성범죄를 저지른다”며 “성폭력이 인격을 말살하는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 부적응 학생 대안 시급=전문가들은 강력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입시 준비 일변도인 공교육에 적응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유병선 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서부지소장은 “현행 대안학교는 ‘문제학생 집합소’ 정도로 잘못 운영되고 있다”며 “기숙시설과 교육문화센터가 합쳐진 개념의 대안학교를 만들고 공부 이외의 다른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교사를 배치해 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롤 모델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이 현재 시행 중인 ‘학교장 통고제도’처럼 비행을 저지른 학생들에게 신속하게 도움을 주는 제도도 활성화돼야 한다. 학교장이 법원에 직접 학교폭력 사실을 알리면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비행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내리는 제도다. 서기석 수원지방법원장은 “청소년 비행은 성인에 비해 급속히 악화되므로 조기 개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며 “법원 외 다른 사회기관에도 같은 취지의 제도가 확산되면 좀 더 많은 청소년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 기자
김보경 정보검색사

범죄자 심층 인터뷰해 형량 정할 때 참고 … 검찰선 반대

◆양형조사보고서=공정한 ‘양형(量刑)’을 위해 법원 조사관이 작성하는 보고서다. 법원이 유전무죄 등 불공정 재판 논란을 막기 위해 2009년 7월 양형기준제를 실시하면서 도입됐다. 조사관은 피고인과 주변 사람, 피해자 등을 심층 인터뷰한 뒤 범죄에 이르게 된 각종 요소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법관의 공정한 재판을 돕는다.

 하지만 검찰은 형사소송법에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있다. 법원은 법원조직법에 조사관을 두도록 한 규정이 있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검찰은 피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므로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법원조사관이 피고인을 접견하려 해도 구치소 측 거부로 문답서만 서면으로 제출받는 경우도 있다.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 등이 양형조사관제가 포함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지난 국회에 제출했지만 18대 국회 임기 종료에 따라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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