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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22. 투명경영 거리 먼 중소기업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기업 신용도 분석을 위해 자산규모가 50억원이 안되는 한 중소 제조업체의 회계장부를 보다 깜짝 놀랐다.

자산의 40%, 매출의 30%가 가(假)지급금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급금이란 대개 대주주나 대표이사가 회사에서 꾼 돈이나 증빙없는 현금 지출분을 한데 모은 회계항목이다.

경험에 비춰 그 업체는 좀 심한 편이다. 기업주가 엉뚱한 데 한눈을 팔아 돈을 빼가거나, 로비나 접대할 곳이 워낙 많거나 두가지 중 하나다.

업무를 하다 보면 '우리 중소업체의 투명경영은 참 갈 길이 멀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엔 '주머닛돈이 쌈짓돈' 이라는 식의 기업주들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함께 뇌물.향응 없이 사업하기 힘든 총체적 부패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규모 업체 중에는 가지급금이나 주주.임원 대여금 항목에 적잖은 금액이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상당수 중소기업의 회계장부는 형식에 불과하다. 지난 연말 많은 중소기업의 경리부서에서는 결산기를 맞아 자산규모를 줄여 잡으려는 촌극을 벌였다.

자산 70억원 이상이면 외부 회계감사 대상이 되니 이를 피하기 위해 장부를 조작한 것이다.

최근 대형 건물.레저시설 등을 인수하며 현금 동원력을 뽐낸 한 업체는 자산이 1천억원이 넘는데도 주식회사로 전환하지 않고 회계감사를 받지 않고 있다.

40여년 역사의 한 중소기업도 자산이 6백여억원, 금융기관 차입이 3백여억원인데 여전히 유한회사로 남아 감사를 피하고 있다. 일부 학교법인이나 병원 등도 투명성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몇년 전만 해도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면 "무슨 죄를 졌길래 중소기업을 경영하느냐" 는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2년 전부터는 "전생에 무슨 덕을 베풀었길래 중소기업 경영자로 태어났느냐" 로 말을 바꿨다.

우리의 중소기업 지원제도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중소업체도 이제 장래성에 따라 당당히 벤처투자나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회계장부 분식을 예사로 아는 중소기업주들이 정부.대기업에 비해 대출이 너무 힘들다고 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이정조 <향영21c리스크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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