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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달구는 투수들의 신종 변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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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종 변화구를 보면 2012 프로야구가 보인다.

현대 야구는 구종 백화점 시대를 맞이했다. 요즘 투수는 적어도 세 가지, 많으면 다섯 가지 구종을 던진다. 발음하기 쉽지 않은 구종도 생겨나고 있다. 야구의 발전과 구종의 다양화는 궤를 같이한다. 타자를 이겨 내기 위해 투수도 변화와 연구가 필요한 법이다.

한화 류현진(25)이나 KIA 윤석민(26)처럼 빠른 직구와 각이 날카로운 변화구를 갖고 있는 국가대표 출신 에이스도 예외는 아니다. 현역 시절 최고 투수였던 선동열 KIA 감독은 “직구 하나만 잘 던져도 10승, 여기에 제대로 된 변화구를 얹으면 15승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두 가지 구종만으로 타자를 잡아내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제3, 제4의 구종이 탄생한다. 올 시즌 프로야구에선 윤석민의 팜볼, 한화 박찬호(39)가 던지는 컷패스트볼, 삼성 마무리 투수 오승환(30)의 신무기 원심패스트볼이 눈길을 끄는 신상품이다.

윤석민이 살려낸 ‘박철순 팜볼’

손바닥에 공 붙여 밀어 던져
슬러거 강정호·최형우도 헛스윙
“처음 보는 공, 황당했다”

윤석민

4월 11일 광주 KIA전에서 삼성 강타자 최형우(29)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7회 초 1볼 2스트라이크. 투수 윤석민이 던진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변화구를 치려다 방망이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윤석민이 이때 던진 공은 시속 116㎞로 기록됐다. 그가 던지는 직구와는 30㎞ 이상, 슬라이더와는 20㎞ 가까이 속도 차이가 났다. 커브라고 하기엔 낙차가 너무 컸다. 그 공은 윤석민이 올 시즌 들어 처음 선보인 팜볼이었다.

 투수들은 거의 대부분 공을 던질 때 실밥을 손가락으로 채 회전을 준다. 팜볼은 공을 손바닥에 붙인 다음 밀어 던지는 공이다. 손가락으로 찍어 쥔 채 밀어서 던지는 너클볼과 마찬가지로 회전이 없다. 그래서 공을 놓는 순간 하늘로 치솟았다가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진다. 좌우로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

 윤석민은 4월 19일 자신의 한 경기 최다 탈삼진(14개)을 기록한 서울 목동 넥센전에서도 강정호를 상대로 팜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 처리했다. 어정쩡하게 방망이를 돌렸던 강정호는 “처음 보는 공이라 이상했다. 커브는 아니고 직구가 그냥 밀려서 오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진=박종근 기자]

 윤석민은 2008년 롯데전 강민호 타석에서 팜볼을 처음 던진 것으로 알려진다. 강민호는 당시 당황해 살짝 웃기도 했다. ‘이 공 뭐야’라는 표정이었다. 윤석민은 그때만 해도 팜볼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투구 폼도 다른 공을 던질 때와 달랐고, 컨트롤도 안 좋았다. 그런데 지난겨울 스프링캠프에서 두 차례 팜볼을 테스트하며 감을 잡아 올 시즌 실전에서 던지고 있다. 팜볼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 OB 우승의 주역으로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투수 박철순이 자주 사용해 타자를 곤혹스럽게 했던 구질로 유명하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던 박철순은 그해 다승 1위(24승), 평균자책점 1위(1.84)로 리그를 지배했다. 그때 위력을 발휘한 공이 팜볼이다. 변화구로 기껏해야 커브와 슬라이더가 있던 시절, 박철순이 자유자재로 구사한 팜볼은 공포 그 자체였다. 박철순 이후로 팜볼을 던지는 투수가 없었다는 게 야구계의 중론이다. 윤석민이 30년 이상 잠자고 있던 구종을 되살려 낸 것이다.

 윤석민은 최고 시속 150㎞의 직구와 140㎞가 넘는 고속 슬라이더를 주로 던진다. 빠른 공 2개를 생각하는 타자 입장에서 팜볼은 시쳇말로 ‘쥐약’이다. 선동열 감독은 “직구가 좋은 투수이기에 구속 차가 매우 큰 팜볼은 큰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팜볼 구사엔 제약이 따른다. 밀어 던지는 투구 메커니즘상 제구하기가 어렵고 자주 던지면 눈에 익어 얻어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팜볼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타자에겐 부담이다.

ML서 익혀온 박찬호 컷패스트볼

직구처럼 오다 왼쪽 아래로 꺾여
양키스 마무리 리베라에게 배워
맞아도 땅볼 … 타자들 “차라리 안 친다”

박찬호

한국 복귀 자체가 큰 화제가 된 박찬호는 컷패스트볼이란 공으로 눈길을 모으고 있다. 컷패스트볼은 시속 150㎞ 후반대의 강속구를 더 이상 뿌리지 못하는 박찬호가 한국 무대 연착륙을 위해 메이저리그 시절부터 갈고닦은 구종이다.

 컷패스트볼은 직구처럼 날아가다 왼쪽 아래로 살짝 꺾이는 공으로 일명 커터로 불린다. 아래로 떨어져 땅볼을 유도하기에 적합한 공이다. 박찬호는 3월 시범경기 때 이 공을 처음 선보였고 정규리그 개막 후엔 왼손 타자 상대 결정구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박찬호의 컷패스트볼은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변화가 시작돼 직구와 구분이 쉽지 않다고 한다.

 4월 29일 박찬호와 상대해 3타수 무안타에 그친 넥센 장기영(30)은 “서재응(KIA) 선배의 커터가 낙차가 크다면 박찬호 선배가 쓰는 커터는 빠르게 오다 갑자기 휜다. 방망이가 나가다 ‘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왼손 타자들 사이에선 박찬호의 컷패스트볼을 두고 “스윙을 참는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쳐봤자 빗맞은 땅볼이 나오니 안 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사진=박종근 기자]

 한화의 2선발을 맡고 있는 박찬호는 이 공을 2009년 필라델피아 시절 베테랑 투수 제이미 모이어의 도움으로 익혔다고 한다. 201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엔 마리아노 리베라로부터 그립·제구 등 더욱 구체적인 것을 배웠다. 리베라는 컷패스트볼을 앞세워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608세이브)을 세운 최고 마무리투수다. 이 공으로 타자들의 방망이를 무수히 부러뜨리기도 했다.

한국 야구엔 컷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가 드물다. 그동안 외국인 투수가 주로 사용했고 김선우(두산)·서재응 등 메이저리그 출신만 간간이 던졌다. 이만수 SK 감독은 “박찬호의 커터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공”이라고 했다.

오승환의 원심패스트볼 실험

다르빗슈의 MLB 돌풍 주무기
검지에 실밥 하나 걸어 던지면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파고들어

오승환

시속 150㎞의 묵직한 직구가 주무기인 오승환은 상대의 집중 견제에 대비해 원심패스트볼을 갈고닦았다. 지난해 47세이브·평균자책점 0.63으로 철벽 뒷문을 뽐냈지만 “떨어지는 공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승환은 원심패스트볼에 대해 “실밥 하나만 검지에 걸어 던지면 공이 회전할 때 공기의 저항을 받아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원심패스트볼은 실밥 두 개를 쥐고 던지는 투심패스트볼보다 변화각이 크다. 한마디로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텍사스에 입단한 일본인 투수 다르빗슈 유가 원심패스트볼로 유명세를 치렀다.

 지난해 아시아시리즈 소프트뱅크와 결승전에서 이 공을 던졌던 오승환은 올해 정규리그에선 구사하지 않고 있다. 1점을 막아야 하는 마무리투수의 특성상 완성 단계가 아닌 공을 던지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승환은 올해 평균자책점이 5점을 넘을 정도로 부진하다. 세이브 실패와 패전도 있다. 직구 일변도의 패턴에 타자들이 적응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원심패스트볼이 절실해졌다.

[사진=박종근 기자]

 90년대까지는 투수들이 커브나 슬라이더 정도만으로 타자를 제압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팔이 길고 체격이 좋은 외국인 타자가 들어오면서 떨어지는 공이 필수가 됐고, 포크볼·체인지업 등이 유행을 탔다. 해태와 OB 등에서 뛴 이광우는 포크볼을 던지려 검지와 중지 사이를 찢는 수술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올해는 외국인 타자가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구종에 대한 투수들의 욕구와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김시진 넥센 감독은 “투수는 그대로인데 타자들은 나날이 발전한다. 지난해에 10승 했다고 올해 10승 하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기계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새 구종 연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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