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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파워 중견기업인 …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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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가난한 시골 고학생에서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치의학 박사, 치과병원 원장, 그리고 임플란트 사업가로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대표의 이력이다. 최 대표가 매출 국내 1위, 세계 6위를 달리는 오스템의 임플란트 모형을 들고 있다. [최승식 기자]

‘공부 잘하는’ 시골 소년이었다. 80가구가 모여 사는 농촌 마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신계리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다. 농사일이 바쁜 아버지는 “성적표 가져와라”는 말씀 한 번을 안 하셨다. 그래도 소년은 장학금을 받고 명문 천안고에 진학했다. 3년간 자취생활 후 1979년 서울의 한 대학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3학년 때 진로 고민이 시작됐다. ‘이대로라면 그냥 회사원이 될 텐데’ 생각하니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운영하는 사무실’을 갖고 싶었다.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친 뒤 숟가락 하나 들고 후배네 자취방에 비비고 들어가 살았다. 그곳에서 넉 달간 학력고사를 준비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합격했다.

 ‘공부 못하는’ 대학생이었다. 1985년, 스물다섯 살에 다시 새내기가 됐다. 5~6세 어린 동기들 사이에서 ‘수재’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집에 차마 “등록금을 보내 달라”고 할 수 없어 내 공부보다 과외교습 학생의 공부를 더 많이 했다. 졸업 등수는 같은 과 126명 중 90등이었다.

 임플란트(인공치아) 시장 점유율 국내 1위에 세계 6위, 해외 15개국 현지법인을 보유한 오스템임플란트의 창업주인 최규옥(52) 대표 이야기다. 농촌에서 시내로 유학 온 고학생, 서울대를 졸업하고 치의학 박사 학위를 소지한 병원장 출신, 매출 1700억원대 회사를 이끄는 최고경영자(CEO). ‘개천에서 용 난’ 한국 현대사의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최 대표는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무엇 하나 뛰어나게 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잘하는 게 없어 아쉬운 대로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오늘의 사업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거다. 그러면서 슬쩍 덧붙였다. “사장이 혼자 잘하는 ‘원맨쇼’가 되면 구멍가게밖에 이끌 수 없다”고 말이다.

부산시 거제동의 오스템 임플란트 생산본부에서 직원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92년 서울 여의도에 치과병원을 열 때만 해도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저 치과병원 운영에 ‘불편한 것’ 몇 가지를 손봤을 뿐이다. 출발은 보험 청구, 진료·영상 관리 등의 병원 행정업무용 소프트웨어였다. ‘도스(DOS)’라는 운영체제 기반으로 돼 있던 당시 프로그램은 사용이 영 불편했다. 누가 좋게 만들어 주기를 기다릴 성격이 못 됐다. 96년, ‘내가 만들어 보자’ 마음먹고 주변을 뒤져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모았고, 몇 개월 후 ‘두번에’라는 치과 진료용 소프트웨어가 완성됐다. ‘두 번만 클릭하면 된다’는 의미다. 이왕 만든 프로그램이니 혼자 쓰기는 아까웠다. 동료 치과의사들에게 ‘두번에’를 열심히 소개했더니 보급 속도가 빨랐다. 여세를 몰아 치과의사들이 의견과 경험을 나누는 전용 PC통신망을 만들었다. 당시는 천리안·유니텔·하이텔 같은 PC통신이 많이 쓰일 때였다. 역시 개발자들을 고용해 통신망을 완성했다. 99년 말, 2000년 밀레니엄이 되면 기존의 도스 기반 프로그램에 버그(오류)가 나 쓸 수 없게 된다는 말이 돌았다. 다른 프로그램은 모두 도스형 프로그램이었는데 최 대표가 만든 소프트웨어만 윈도 기반이었다. 치과의사들은 앞다퉈 소프트웨어를 교체했고, 얼마 안 가 전국 치과의사의 65%가 최 대표의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됐다. 최 대표는 이때를 “엉겁결에 벤처사업가가 된 때”라고 회상했다.

 임플란트 사업의 시작 역시 ‘치밀한 계획’보다는 ‘벼락같은 인연’에 가까웠다. 김대중 정부가 벤처사업을 육성하던 2000년, 최 대표는 벤처사업가로 어느 정도 이름이 나 있었다. 하루는 국내 최초의 임플란트 제조업체인 수민종합치재로부터 “제품 유통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외환위기 이후 자금난을 겪고 있는 회사였다. 최 대표는 소프트웨어를 유통한 경험이 있기에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회사 측 제의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서울 지점을 맡아 달라”던 데서 “전국 총판을 맡으면 안 되겠느냐”고 이야기가 옮아가더니 며칠 뒤에는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를 아예 사 가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인수금액은 부채를 포함해 70억원대. ‘관심’이나 ‘취미’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였다. 주변에서는 위험하다며 다들 말렸지만 최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임플란트 시술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다. 틀니나 보철 브리지를 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인공치아 뿌리인 임플란트는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시술법을 아는 의사가 드물었고 임플란트도 외국산이라 비용이 개당 400만원대로 비쌌다. 그는 “국산 임플란트 회사를 키워 대중화하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수를 결정했다. 의사에서 사업가로의 본격적인 전환, ‘루비콘의 주사위’가 던져진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인수 직후 벤처 바람이 꺼졌다. 투자가 끊기고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최 대표는 직원 100여 명의 월급을 주기 위해 개인 부동산을 처분하는 것은 물론 지인들에게 5000만원씩 돈을 빌리러 다녔다. 시장 상황도 어두웠다. 외국산에 익숙한 치과의사들은 국산 임플란트의 품질을 못 미더워했고, 결정적으로 임플란트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몇 없어 시장 규모가 제자리였다.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난관을 뚫은 것은 ‘교육으로 씨 뿌리기’ 전략이었다. 회사가 적자에 허덕이던 2001년, 서울 삼성동에 임플란트연수센터(AIC)를 세웠다. 치대 교수들을 강사로 초빙해 임플란트 시술과 최신 진료법을 가르치는 6개월 과정을 개설하고, 원하는 치과의사는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게 했다. 한 과정을 진행하는 데 시설비만 2억여원이 들었다. 임원들은 “안 그래도 적자인데 사장님 제정신이시냐”고 반대했다. 하지만 최 대표는 “적자를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며 밀어붙였다. “임플란트를 시술할 수 있는 의사 수를 늘리는 게 먼저”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당시 국내 치과의사는 해외 유학을 다녀온 의사들이 3~4주 코스로 여는 사설 연수회에서 400만~500만원을 내고 임플란트 기술을 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께가 되자 사설 연수회는 AIC에 밀려 자취를 감춘다. “그들은 등록금을 받는 게 목적이었어요. 자기에게 배운 의사가 시술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되는지에는 관심이 없죠. 우리는 임플란트를 파는 게 목적이잖아요. 연수받는 의사가 임플란트 시술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기까지 가르쳤어요. 교육의 질에서 상대가 안 되는 거죠.”

 AIC 설립 후 2년 만에 오스템의 매출은 다섯 배로 뛰었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치과의사들이 손에 익은 오스템의 제품을 자기 병원에서 사용한 덕이다. 임플란트의 대중화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현재 국내 치과의사 중 임플란트 시술이 가능한 비율은 80%를 넘고, 10년 전 400만원대이던 임플란트 비용은 150만~200만원대까지 내려갔다.

 해외 수출에서도 오스템의 전략은 역시 ‘치과의사 교육’이다. 일본·미국·독일·러시아·호주 등 해외법인을 세우는 곳마다 즉시 교육센터를 열어 현지 의사들에게 임플란트를 가르쳤다. 지금까지 6200명의 한국 치과의사, 9000명의 외국 치과의사들이 AIC를 거쳐갔다. 현재 최 대표는 중국 시장을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 내에 빠져서 넣어야 하는 이가 30억 개가 넘는다”며 “이 추세로라면 앞으로 200년은 줄기차게 임플란트를 심어야겠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제시하는 또 다른 성공비법은 자칭 ‘선무당 경영’이다. “선무당이 장구 탓 하듯 ‘내가 못하는 거겠지’ 생각하지 말고 더 좋은 장비와 기술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료용 소프트웨어 개발도, 국산 임플란트가 일본 후생성과 브라질 식약청, 유럽연합(EU)의 품질 인증과 미국 식품의약국(FDA) 최고등급을 받기까지의 품질 개선도 모두 ‘선무당 경영’으로 이뤄 냈다. “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혀 못하고, 임플란트로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잘하면 자기 방법만 고집하거든요 .”

 최 대표의 최종 목표는 ‘공부’로 귀결된다. 그는 오스템의 비전으로 “치과의사의 학습 조직화”를 제시했다. “공부 죽어라고 해서 치과대학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면 공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졸업하면 생전 공부를 해 본 적도 없는 사람같이 돼요. 계속 새로운 진료기술을 안 배우고 대학에서 배운 것만으로 평생 의사생활을 하려니 문제죠. 한 명도 빠짐없이, 전 세계 모든 치과의사에게 임플란트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오스템의 꿈입니다.”

글=심서현 기자
중앙일보-대한상의 공동 기획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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