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뭘 찍을지 나도 잘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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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홍상수 감독

홍상수(52 )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의도’ ‘주제의식’이라는 단어는 금칙어다. 다른 감독들에게 흔히 묻는 ‘왜 그런~’이라는 질문도 꺼려진다. 물어본다고 답변해주는 것도 아닐 뿐더러 ‘왜 그걸 묻는가’라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화는 명료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보는 이의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물건’이다. 삶이란 정교하게 짜여진 관념으로 해석하고 움켜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세계관이 영화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그래서 직관과 우연, 무의식의 흐름 같은 요소가 그의 영화를 관통한다. 그의 13번째 영화 ‘다른 나라에서’(31일 개봉)도 마찬가지다. 홍 감독은 이 영화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관록있는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59)는 잘 나가는 영화 감독(1부), 한국 감독과 불륜에 빠진 유부녀(2부),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이혼녀(3부) 등 1인 3역을 해냈다. 세 개의 이야기가 닮은 듯 다르게 겹쳐지는 가운데 등대를 찾아헤매는 안느(이자벨)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18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이자벨이 출연한 계기는.

 “전북 부안의 모항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려 했는데 마침 이자벨이 어떤 역이든 상관없이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 이자벨과 작업해보니 어떤가.

 “많이 불편했을텐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했다.”(이자벨은 어떤 스태프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부안까지 내려갔다.)

 - 이번 영화에도 임신한 아내(문소리) 몰래 안느에게 집적대는 영화감독(권해효), 자의식 과잉의 영화감독(문성근) 등 위선적 남성상이 보이는데.

 “작업의 중요한 결정은 계산해서 만들지 않는다. 인물형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물형이 떠오른 것 뿐이다. 삶은 복잡하다. 인간도 복잡한데다 모순된 게 많다. 그걸 물건(영화)에 담으려 한다.”

 - 여전히 대본은 촬영 당일에 만들었나.

 “나도 내가 다음날 뭘 찍을 지 모른다. 촬영하면서 그때 그때 조율해간다. 안느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우산도 촬영 때 비가 많이 와서 등장했을 뿐이다.”

 - 홍상수 영화는 반응이 참 다양하다.

 “단선적 의도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직관과 우연을 많이 수용한다. 그래서 영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현실 인식이나 보편적 정서가 아닌, 직관적인 소재를 파고들면서 하나씩 발견되는 것들을 모아 물건을 만든다.”

 - 예산의 제약 때문에 아쉽지 않나.

 “제작비 때문에 제작방식이 바뀌긴 하지만 불편하거나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속의 새로운 걸 끄집어내는 자극이 된다.”

 - 칸 영화제도 그렇고, 프랑스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어떤 점이 프랑스 문화와 맞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찾아내고 싶지도, 일반화하고 싶지도 않다.”

 - 영국의 가수 겸 배우 제인 버킨도 영화에 출연했다고 들었다.

 “그가 3월에 방한했을 때 서울에서 찍었다. 한 신에 나온다. 영화는 7월쯤 완성된다.”(버킨의 간곡한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관계자는 밝혔다.)

 - 요즘 즐겨보는 영화는.

 “존 포드 감독의 옛날영화가 예쁘다. 내 안의 어린애가 끊임없이 자양분을 요구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다.”

글=정현목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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