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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재정 거덜나 … 내년 깊고 긴 심장불황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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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유럽발 악재로 코스피지수가 계속 추락하던 지난 17일, 서울 공덕동 CJ경영연구소 사무실에서 김경원 CJ경영고문과 마주 앉았다. 그는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이던 2008년 당시 골드먼삭스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유가가 치솟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을 때 거꾸로 “유가가 반토막 날 것”이라는 도발적 의견을 냈던 인물이다. 세계 최고 투자은행(IB)과 정반대의 전망을 내놓아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결론은 해피엔딩. 130달러대였던 유가가 200달러는커녕 베이징 올림픽 이후 반토막 나면서 그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런 그가 삼성경제연구소 동료였던 김준원 대불대 교수와 함께 최근 『대한민국 경제 2013 그 이후』를 냈다. 책 표지엔 빨간 글씨로 “10년 후가 문제가 아니다. 당장 2013년이 위험하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 가뜩이나 그리스·스페인 문제로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책 제목이 너무 공포스럽다.

 “올 하반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가 정말 걱정이다. 세계경기가 하락하면서 깊고 긴 불황, 다시 말해 ‘심장불황’이 올 거다. 경기변동성이 워낙 커져 경기사이클을 예측하기 어렵지만 2013년엔 연착륙을 기대하기 어렵다. 경착륙이 아니면 추락이다. 다만 더블딥은 안 온다.”

 - 근거는.

 “각국 재정이 거덜나고 통화정책의 효력이 떨어진 탓이다. 지금까지는 중국이 받쳐줬기 때문에 돈을 맘 놓고 풀 수 있었다. 돈을 풀면 자산효과 때문에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이 됐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잡은 게 아니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해장술 사이클’에 불과했다. 술 먹어 생긴 병을 술로 푸는 식 말이다.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인플레는 죽었다’고 했지만 실은 착각이었다. 중국의 (인플레를 낮춰주는) 디플레이터 역할이 끝나면서 지금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다. 통화를 풀면 인플레가 바로 온다.”

 - 예고된 악재는 진짜 악재가 아니라던데.

 “그렇지 않다. 20여 년 이코노미스트 경험상 예고된 악재는 결국 실제 악재로 나타나더라. 리스크(risk·위험)의 어원이 암초라고 한다. 암초를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물론 다양한 해법이 나오겠지만 한국이 걱정이다.”

 - 뭐가 가장 큰 걱정인가.

 “우선 재정건전성이다. 정부가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정부가 주장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글로벌 기준으로 공기업 부채와 통안채를 포함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이미 70~80%가 넘는다. 지금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솔직하게 밝히지 않으면 큰 위기가 왔을 때 불신의 씨앗이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일부 외신의 근거 없는 한국 경제 흔들기로 얼마나 고생했나. 그런 꼴을 다시 안 당하려면 먼저 국내외적으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가계부채 문제도 심각하다. 집값을 더 이상 떨어뜨리면 안 된다. 난 2000년대 초반부터 금리를 올려서 집값을 잡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미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가계부채의 60~70%가 집과 관련된 거다. 이런 상황에서 집값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나. 부동산 거래세를 낮추고 보금자리주택 보급을 줄이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 책 중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쓴 내용이 인상적이다. 인터넷 보급이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지적 말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원래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체제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 두 체제의 모순을 느끼지 못했던 건 미국이 이 둘을 성공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몇몇 엘리트가 이끌어가는 대의제였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접목할 수 있었다. 비이성적인 일부 국민의 요구를 정계와 언론계의 엘리트가 다 걸러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직접민주주의가 된 거다. 어느 나라나 인터넷 보급률이 상승하는 시기와 복지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는 시기가 비슷하다. 인터넷 보급은 12살짜리에게 기관총을 준 거나 똑같다.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은 점점 낮아진다. 역설적으로 몇 명만 큰소리를 내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도 정책으로 채택된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얘기하다 보니 어느 정부도 소신을 갖고 제대로 된 정책을 펴기 어렵다. 그리스를 한번 보자. 그리스는 큰 수술을 해야 하고 국민들이 그걸 참아내야 한다. 하지만 소위 열렬 인터넷 당원들한테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더 취약하다. 복지 포퓰리즘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 너무 비관적이다.

 “아니다. 난 희망을 말하는 거다. ‘심장불황’이 끝나면 한국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다. 중국의 최저임금 상승률이 가파르다. 내수가 곧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얘기다. 중국이 왜 빨리 긴축을 풀지 않느냐 하는 궁금증이 많다. 나는 중국 정부가 부양할 힘을 지금 비축해 놓는 거라고 본다. 중국이 경기부양을 시작하면, 그리고 한국이 ‘심장불황’을 이겨내면 가장 큰 수혜주가 될 거다.”

글=안혜리·사진=김도훈 기자

◆김경원=“이코노미스트는 숫자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 퍼즐 조각이 조금만 주어져도 전체 그림을 잘 맞추는 이야기꾼이다.” CJ 경영고문인 그는 스스로 내린 정의대로 20년 가까이 퍼즐을 맞추며 살아온 현장형 이코노미스트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을 거쳐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전무)을 끝으로 삼성에서의 18년 생활을 접고 2009년 CJ로 옮겼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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