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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걱정할 때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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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02면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요동치자 안내 방송이 나왔다. 기상이변으로 더 이상 운항할 수 없다며 “하느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란 승객이 옆자리의 목사에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다. 목사는 “희망이 없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하느님의 뜻’이나 ‘희망 없음’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같은 의미라는 일화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뜬금없이 이 얘기를 꺼낸 건 유럽 사태 때문이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탈퇴가 임박했고, 스페인으로 위기가 전염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은 “긴축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탈퇴하라”고 그리스를 압박하고 있다. 반면 그리스는 “긴축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으니 유럽연합(EU)은 포커 게임을 중단하라”고 맞받아쳤다. 양측의 주장만 놓고 보면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씨티그룹도 탈퇴 확률을 75%로 점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리스는 유로존을 탈퇴하지 않고 긴축 프로그램을 수정·완화하는 선에서 타협을 모색할 것이다. 양측이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의미는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ECB의 협박은 “너희가 탈퇴하면 유럽은 물론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다”는 속내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스의 협박 역시 “탈퇴하지 않을 테니 긴축안을 완화해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보는 건 양쪽 모두 그리스의 탈퇴가 초래할 심각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곧바로 국가 부도고, 기업은 줄도산을 한다. 경제는 초(超)인플레이션으로 치닫는다. ECB 역시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재연(再燃)이고, 더블딥(2차 불황)의 시작이다. 바보가 아닌 담에야 이런 길을 택할 리 만무하다. 하물며 ‘하나의 유럽’은 그들의 오랜 꿈 아닌가.

그렇다고 유럽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 당장 폭발하진 않을 뿐이다. 대신 유럽 위기는 질질 끌 것 같다. 수시로 위기의 불씨가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 것이다. 그리스가 잠잠하면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이 이어받을 거다. 향후 몇 년간 계속 그럴 조짐이다. 유럽 사태를 심각하다고 보는 건 그래서다.

정작 걱정되는 건 유럽이 아니라 한국 경제다. 세계가 흔들릴 때마다 충격을 심하게 받는 경제 구조라서다. 특히 가계부채 문제에 불씨가 옮겨붙으면 그때는 백약이 무효다. 적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 법, 생각 있는 정부라면 이런 내부 구조를 개선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수출·제조업 위주에서 벗어나 내수·서비스의 동반성장 구조로 바꾸고, 성장의 추락도 막아야 했다. 균형 재정이란 도그마에 빠져들어 팔짱만 낀 채 구경하지 말아야 했다. 선거의 해를 맞아 어떻게든 복지 포퓰리즘을 막겠다는 의지를 탓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정부 스스로 발목을 잡아 ‘경제정책의 실종’을 초래해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아무리 강조해도 정부는 여전히 마이동풍이니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정부는 유럽 사태에 대비한다며 경제·금융 상황 점검회의를 열었다. 비상대응계획을 세우되 균형 재정이라는 경제정책 기조는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다. 만의 하나에 대비한 시나리오별 대책을 세우는 건 맞다. 외환위기의 재연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성장 추락과 가계부채 문제의 해결책도 같이 내놓아야 했다. 최소한 균형 재정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선언이라도 해야 했다.

내부가 튼튼하면 아무리 심한 외풍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다. 지금처럼 별무 효과인 활성화나 안정화 대책을 찔끔찔끔 내놓지 말라는 얘기다. 균형 재정이 깨지면 어떠랴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을 푸는 것도 검토해야 할 때다. 그래야 소비부진이 완화되고 경기 추락도 막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도통 그럴 의지가 없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하는 심리가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다. 문제는 유럽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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