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메트로 와이드] 벼룩시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 춥다. 어려워진 살림 때문에 어깨가 더욱 움츠러든다. 어머니는 통장을 보고 "돈쓸 데가 없다" 며 한숨을 짓는다.

며칠전 봐뒀던 최신 유행 옷과 god의 CD가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수중에는 단돈 몇천원. 그래도 방법은 있다. 벼룩시장에 가보자. 비록 새 것은 아니지만 새 것과 다름없는 괜찮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청소년이라면 끼리끼리 통하는 'n세대 벼룩시장' 이 제격이다. 중년이라면 '서초 벼룩시장' 이나 '황학동 벼룩시장' 을 찾아 추억에 묻혀봐도 좋다. '덤으로' 원하는 물건을 싼값에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은 추위를 녹이고도 남는다.

#2001년 1월 6일 황학동 벼룩시장

인터넷 프로그래머이자 스키보드 매니어인 김진형(27)씨는 이날 황학동 시장을 뒤져 미군이 입었던 군복 바지를 6만원에 샀다.

김씨는 "군복 바지를 입고 보드를 타면 멋져 보인다" 며 "여기가 시중보다 50%는 싸다" 고 경험담을 얘기한다.

게다가 김씨는 최근 시중에 선보인 게임용 CD를 4천원에 세장이나 사들였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의 온갖 고물이 몰려 들어 중고품 시장이 형성됐다는 황학동 벼룩시장. 2001년 황학동엔 이렇게 60년대 향수(鄕愁)와 21세기 첨단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청계천8가를 따라 죽 늘어선 점포는 레코드점.헌책방.고가구점 등 나름대로 집촌(集村)형태를 띠고 있다.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면 TV.냉장고.오디오 등 전자제품 가게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요즘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이 고가구점으로 몰리고 있다. 재봉틀다리(2만5천원).학교종(5만원).돌절구(7만원)는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품목이다.

뭐니뭐니 해도 황학동의 진미는 길가에 늘어선 좌판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보따리를 풀자마자 별의별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2벌식 타자기.나막신.풍기.전투복.콧털깎이 등 만물 백화점이 따로 없다.

가격은 흥정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쪽에선 치질약을 광고하는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이 구경하던 사람들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돌아다니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2천원짜리 따끈한 손칼국수로 속을 채우면 그만이다. 순대국.곱창집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고 뼈없는 닭발.야채곱창 등을 즉석에서 구워준다.

#2001년 1월 7일 n세대 벼룩시장

"언니, 이거 짝퉁(가짜)아닌데. 3천원이면 거저 드리는 거예요. "
"너무 비싸다. 2천5백원에 안될까. "
"그러면 3천원에 스티커 한장 끼워드릴게요, 네?"

서울 중구 을지로5가 국립의료원 옆 훈련원공원. 겨울 찬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뜰한 신세대 사이에서 가격 흥정이 한창이다. 매월 첫째.셋째주 일요일 이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n세대 벼룩시장' 은 1999년 10월 첫선을 보인 이래 신세대 젊은이들만의 벼룩시장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에 요요기 공원, 프랑스에 파리 방그가 있다면 한국에는 n세대 벼룩시장이 있다.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은 대부분 중.고생.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열리는데 주최측인 쌍용건설은 천막을 세우고 돗자리.열풍기.쇼핑백까지 제공해 준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장사꾼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물건을 내놓을 수 있는 나이를 16~23세로 제한했다. 물론 구경하거나 사는 사람은 연령 제한이 없다.

주최측은 언더밴드나 힙합댄스팀을 초청해 다양한 문화 공연도 벌이고 있다.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3백여명이 '장사꾼' 으로, 1천여명이 '구경꾼' 으로 꾸준히 몰려드는 이곳에선 거래되는 물품도 귀엽다.

옷과 핀.CD.인형.책 등 청소년들의 눈길을 끌만한 물건들이 대부분이며 가격은 5백~5천원선이다.

이곳을 다섯번째 찾는다는 성훈정(17.구리 인창고1)양은 올 때 마다 평균 1만원 정도의 매상을 올렸다고 귀띔했다.

주로 자신이 입었던 옷과 가족들이 준 옷을 들고와 2천~3천원에 판다.

훈정양은 "여기서 번 돈으로 동대문상가에 가 맘에 드는 옷을 사입을 작정이에요" 라며 나름대로의 재테크에 열을 올렸다.

옆에 자리를 잡은 친구 이정현(17.구리 인창고1)양은 지난번에 이곳에서 3천원을 주고 산 가방을 2천5백원에 다시 내놓았다.

"몇번 들고 다녔는데 맘에 안들어 팔려고요" .

정현양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머리띠 몇개도 들고나와 하나에 1천원에 팔고 있다. 지난번에는 언더힙합 동아리 '래빈' 의 춤에 청소년들이 열광하기도 했다.

"10만원 주고 사입은 청바지를 5천원에 달라는 거예요. 안팔겠다고 했더니 그냥 가더라고요. 결국 3천원에 팔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

이번에 처음 나와서 옷을 팔았다는 한 여중생은 "1만원 벌기가 너무 힘들었다" 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벼룩시장을 통해 돈의 가치를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었다. 02-3433-7117.

#2000년 12월 30일 서초벼룩시장

"이 코트 두번밖에 안입은 거예요. 자, 한번 입어보세요. "
"아이구, 따뜻하네. "

서울 서초구 서초벼룩시장엔 요즘 겨울코트가 단연 인기 품목이다. 장롱에 몇년간 묵혀 놓았던 코트 다섯 벌을 들고나온 한 아주머니는 남편의 검정색 롱코트를 3만원에 금세 팔았다.

서초구가 1998년 초부터 구청 바로 옆 1백50m 이면도로에 마련한 서초벼룩시장은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현대판 7일장이다.

인근 주민뿐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까지 하루 평균 3천여명 이상 찾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전 9시~오후 3시에 열리며 자리경쟁이 치열하다. 오전 9시 이전에 와서 구청 직원에게 신청하면 3백50명 선착순으로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다.

길 양쪽에 길게 늘어선 판매대에는 옷.신발.가방.전자제품 등 생활과 밀접한 용품들이 즐비하다. 파는 사람은 쌈짓돈 얻어서 좋고 사는 사람은 싼값에 좋은 물건 얻으니 좋다.

겨울인 요즘은 모피와 가죽제품이 많이 보인다. 10년 된 가죽옷, 2~3년 된 모피코트 등 종류는 다양하나 가격은 3만~4만원대다.

이곳을 찾은 주부 황선화(38.관악구 봉천동)씨는 어린이용 토끼털 코트를 2만5천원에 구입했다.

"시중에서 20만원이 넘는 옷인데 이렇게 싸게 사다니 너무 기쁘다" 며 흡족해했다.

가방을 1백여개나 펼쳐놓고 정리에 여념없는 이재훈(사업.종로구 창신동)씨는 이곳에 매주 들르는 단골 판매상이다.

바자에서 떨이로 사거나 이웃집에서 내놓은 가방을 깨끗이 손질해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 루이뷔통 여행가방이 3만원, 고급 핸드백이 1만원 정도다.

이씨는 "주말마다 집에서 쉬느니 이곳에 오는 게 아주 재미있다." 고 말했다.

가벼운 고장으로 쓰지 못하는 가전 제품과 양산.신발.가재도구 등을 이 곳에 가져가면 재활용 수리 자원봉사자가 무료로 고쳐준다. 02-570-6490.

글=박지영 기자
그래픽=박용석.사진=김성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