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가 여기 있다, 불후의 색채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가 여기 있다. 아니 그의 눈이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다문 입술과 넓은 이마, 단정하게 어깨를 덮은 곱슬머리. 털옷을 가슴에 모은 가늘고 섬세한 오른손.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머리는 모피의 갈색과 연계되어 마름모 형을 형상한다. 정치하고 세밀한 묘사와 안정된 구도. 이 모든 것이 예지자의 기품을 사려깊게 한다.

알프레드 뒤러의 '자화상'. 그러나 자세히 보라. 그의 눈은 정면을 향하지 않는다. 눈동자는 정면에서 약간 빗긴 오른쪽을 응시한다. 번뜩이는 예리함, 통찰력이 서린 눈.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와 결코 고갈되지 않을 안광이 거기 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응시하는 것일까. 위엄을 갖춘 눈은 삶과 인생을 통찰하는 것일까. 존재의 외부로 사유의 깊이와 넓이가 광채처럼 빛난다. 그러면서도 서정적인 긴장을 유지하다니 놀랍다.

빛이다. 그렇다 해법은 빛이다. 빛은 오른쪽에서 그를 방문했다. 왼쪽 어깨가 상대적으로 오른쪽 어깨에 비해 어둠에 묻혀있다. 코를 경계로 명암을 처리한 것이다. 명암을 통해서 그가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오른쪽 눈은 침입한 빛의 방향을 응시하며 시야를 화면 밖으로 확장시킨다.

한편,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머리의 오른쪽은, 'AD 1500', 그리고 왼쪽의 라틴어 문장이 그의 신체와 조화하며 묘하게도 십자가 형상을 구도한다. 'AD' 표기는 자신이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독일인임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환기시킨다. 더구나 왼쪽의 문장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화가 알프레드 뒤러는 불후의 색채로 28세 된 나 자신을 그렸다.' 고 분명히 명시했다. 대체 이런 자부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뒤러, 그는 1471년 뉘른베르크에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부터 은필 자화상을 그릴 만큼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고 알려진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학문에 매진하며 전통적인 북유럽의 학문과 예술을 체화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했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가장 위대한 화가였다. 유럽사회는 경탄했다.

그는 빛과 구도, 그리고 극도의 정치한 묘사로 자신을 또 하나의 성채, 즉 순교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깨어 있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형상화했다. 냉철하고 치열한 자기탐구와 준열한 성찰은 눈부신 자기주장으로 이어졌다. 박학다식한 사상가로서의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은 이렇게 유럽 회화사상 가장 감명깊은 성취로 나타났다. 그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자신 역시 불후의 색채로 한 인간을 창조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이콘의 정면상을 자화상의 구도로 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성화 이외의 정면 초상은 당시의 관습으로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그는 금기를 위배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부심 강한 인물로 스스로를 거듭 확인시켰다. 인문정신에 기초한 예술의 창조적 열망을 신의 창조적 권위와 비견하고 싶었던 그의 강한 예술관이 엿보인다.

빛이 오른쪽에서 그를 방문하는 까닭을 이제 이해할 것 같다. 대개 얼굴의 좌측은 사적인 얼굴, 즉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영역을 담당한다. 이에 비해 오른쪽은 공적인 얼굴, 즉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영역이다. 뒤러는 명암을 의도적으로 구획하여 감성적 세계에서 이성적인 세계로 진입하는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부각시킨 것이다. 그는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인문정신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우리의 초상화도 정면상보다는 측면초상이 많다. 주로 왼쪽 측면을 많이 선호한다. 정면상은 드물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안악 제3호분의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시작하여 16∼7세기를 거쳐 19세기에 그려진 태조 이성계의 전신상, 이채의 초상, 20세기의 채용신에 의한 '황현초상' 등이 있다.

정면 초상 중에서 단연 압권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이다. 그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로 유명하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 당쟁이 보다 심화되고 격렬할 때 남인 신분은 평생 그를 제약하는 형벌이었다. 일찌감치 그는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시서화일체를 즐겼고, 경학을 비롯한 천문, 지리, 음악, 금석, 기예 등의 인문학적 소양으로 무장했다.

그의 이채는 '자화상'에서 빛난다. 날카로운 눈매. 경조부박한 현실을 냉혹하게 경계하고 질타한다. 치밀한 세필로 휘날린 수염은 강렬한 에너지로 화면을 찢을 기세다. 엄동설한의 한파가 급습하는 듯 하다. 범속한 관람자의 내면을 도려내는 예리한 칼날은 두려움과 공포로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다. 결택정안(決擇正眼)의 강렬한 에너지가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이처럼 대담하고 호방한 사실주의적 화법은, 자기성찰에 몰입한 주인공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한다. 자신을 통찰하고 매섭게 일갈하는 자기반성이 드높은 결의로 형상화되었다. 가혹한 자기 성찰의 무자비한 정직성에 꼼짝 못할 것만 같다. 비록 이 초상화의 밑그림이 발견되었고, 따라서 이 그림은 미완성이며 실은 도포를 단정히 여민 기품있고 인자한 선비의 모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지금의 파격적인 구도가 오히려 그 답다.

화가를 장인이나 기술자 정도의 수공업자 정도로 경시했던 시대, 뒤러는 이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는 화가의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가 위대한 예술가이며 독자적으로 하나의 르네상스를 완성했다는 지적은 따라서 타당하다. 냉혹한 자기반성의 주인공 윤두서 역시 진보적 의식으로 민중의 삶과 애환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 역시 인문정신을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뒤러가 자기존엄으로 한 시대의 인문정신을 이끌었다면 윤두서는 강인하고 비정한 자기성찰을 통해 휴머니즘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조용훈(yhcho@sugok.chongju-e.ac.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