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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세상보기] 변방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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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백년 전, 세계 과학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였다.

파리에는 명성을 자랑하던 파리아카데미와 최고 과학자를 양성하던 에콜 폴리테크닉이 있었다. 쟁쟁한 프랑스 과학자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는 물리학자 라플라스였다.

그는 뉴턴의 역학을 완성했고, 파리에 수많은 제자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라플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뉴턴의 입자론을 광학(光學)에 적용했으며, 복잡한 수학을 사용해 복굴절과 색편광 같은 어려운 현상을 멋지게 설명했다.

프레넬은 방데.니옹 등 지방을 돌면서 열차 선로 건설을 감독하던 `변방` 의 무명 엔지니어였다.

그가 빛의 파동이론에 대한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한 것은 1815년이었는데, 이는 뉴턴과 라플라스의 입자론을 정면에서 비판한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그의 이론은 곧바로 파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프레넬의 파동이론은 광학의 난제를 하나씩 설명하면서, 빛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모든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믿던 라플라스의 이론은 이렇게 붕괴됐다.

약 1백년 전, 세계 이론 물리학의 중심은 독일의 베를린과 괴팅겐, 네덜란드의 라이든이었다.

중심의 물리학자들은 프레넬의 파동이론이 낳은 난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것은 빛의 파동이론에 따르면 당연히 검출이 돼야 할 빛의 매질 `에테르` 의 효과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괴팅겐의 물리학자들은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복잡한 전자 동역학을 발전시켰고, 라이든의 이론 물리학자 로렌츠는 `국소적 시간` 과 같은 난해한 가설을 도입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물리학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베른이라는 `변방` 의 특허국에 근무하던 직원이었다.

그는 1905년에 완전히 새로운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제창함으로써 에테르가 제기한 난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그런데 이 이론은 에테르라는 매질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든 결과를 낳았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와 비슷하다는 광양자설을 제창함으로써 이것도 해결했다. 프레넬의 파동설을 비롯한 고전 물리학은 여기에서부터 붕괴됐다.

프레넬과 아인슈타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둘 모두 과학 연구의 중심에서 비켜 있었고, 그래서 중심의 과학자들이 당연하게 옳다고 믿던 이론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중심의 과학자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더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프레넬과 아인슈타인은 문제의 근원을 직시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창할 수 있었다.

변방에 상대적으로 고립돼 있다는 `변방성` 이 중심의 과학자들은 상상도 못했던 혁신적인 `창조성` 으로 전화한 것이었다.

지금 세계 과학의 중심지는 어디인가□ 한국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계 과학의 중심에서 볼 때, 서울.대전.포항은 `변방` 에 다름 아니다.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것도, 과학인용색인 SCI에 올라가는 논문 편수를 올리기 위해 과학자들을 독려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방에 있기에 중심의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과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 선진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연구비와 예산을 가지고 `똑같은` 과학을 해서 경쟁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독특한 이점을 창조적으로 살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양적 자연관이라는 전통 문화 속에서 서양과학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는 특수성 때문에 우리만이 가지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변방의 이야기는 21세기를 맞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홍성욱 교수는…
  •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박사(1994)
  •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 95년부터 토론토대 교수로 재직 (현재 부교수 및 종신교수).
  • 저서 : `잡종, 새로운 문화 읽기`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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