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어떻게 진행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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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사업은 1989년 1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받아내면서 논의가 시작됐다.

관광사업 계약이 이뤄진 것은 그로부터 9년 뒤인 98년 6월. 당시는 남북이 서해교전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으나 이 사업만은 순항했다.

북한으로서는 관광사업에서 떨어질 달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금강산 유람선 금강호가 첫 출항한 것은 98년 11월. 출발은 좋았다.

운항 한달 만에 관광객 1만명을 돌파했고, 99년 4월에는 5만명을 넘어섰다.

당초 4박5일짜리 일정을 3박4일로 바꾸고 요금을 낮춘 게 주효했다.

이에 고무된 현대측은 금강호.봉래호에 99년 5월 풍악호를 가세해 매일 운항 체제를 갖췄다.

99년 6월에 발생한 민영미씨 억류사건은 금강산 관광사업이 맞은 첫 위기였다. 8월 4일까지 달포 남짓 유람선 운항이 중단됐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북측이 신변 안전보장에 합의하는 등 태도가 누그러졌다.

99년 10월 외국인 관광이 허용된 이후 지난해 말까지 금강산을 다녀간 외국인은 8백28명에 불과했고 이 중 1백88명은 동포였다.

다급해진 현대측은 지난해 10월 쾌속 관광선을 투입키로 하고 장전항에 해상호텔인 '호텔 해금강' 을 지어 2박3일짜리를 추가했다. 호텔 카지노를 들여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해 말까지 관광객은 37만1천6백37명에 지나지 않아 당초 기대했던 1백20만명에는 턱없이 미달했다.

이 때문에 이 사업을 맡아온 현대아산의 자금사정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현대측은 북한에 주는 입산료 등을 재조정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정몽헌 회장이 직접 북한을 방문하려다가 그만둔 뒤 실무자를 통해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다.

기획취재팀=민병관.정경민.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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