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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가 본 일본애니 〈인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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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패니메이션 〈인랑〉은 난데없이 사전 설명 화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설명해 준답시고 예비군 훈련장의 정신 교육 비디오 비슷한 화면을 본 영화에 앞서 틀어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전후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 그 그늘에서 날로 세력을 더해가는 반정부세력, 그 틈을 타 국가경찰로 승격하려는 자치경찰도 견제하고 반정부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수도경찰을 창설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설명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영화는 그런 설명 없이도 너무나 잘 이해된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수도경찰과 자치경찰의 갈등, 국가전복을 꾀하는 혁명세력, 그 사이에 싹트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음모.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도 간단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답은 엉뚱한 데 있다.

비록 현대적인 외피로 치장을 했지만 '인랑' 의 서사적 얼개는 일본의 전통 서사인 사무라이 이야기 그대로라는 것. 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비밀리에 존재하는 강력한 사무라이 집단이 있다.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또다른 사무라이 집단이 (당연히) 있다. 이들 사이엔 외로운 사무라이, 문제의 사무라이가 하나 있다. 가끔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기도 한다(이름하여 로닌 浪人)). 이 문제의 사무라이를 사랑하는 여자도 물론 있어야한다.

조용히 사랑만 하고 있으면 얘기가 안 되니까 여자를 둘러싼 음모도 있어야겠다. 그러다보면 여러 가지 갈등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은 종국에 이르러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해소된다. 즉, 조직(혹은 주군) 을 위해 문제의 사무라이는 자신 혹은 연인, 때론 모두를 희생의 제물로 바친다.

그러면 비장한 음악과 함께 막이 내려간다. 짜잔

그러니까 〈인랑〉 속의 수도경찰과 자치경찰의 갈등을 보면서, 어쩌자고 한 나라에 경찰 조직을 두 개나 만들어 저런 쓰잘 데 없는 갈등을 자초하는 걸까, 혀를 찰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일본 전국시대 혹은 막부시대에 존재했던 사무라이 집단의 현대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인랑〉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주제를 논하고 있는 보기 드문 걸작 애니메이션이라고 거품을 물어서는 곤란하다. 〈인랑〉은 전통적 사무라이 서사의 재판일 뿐이며 새로운 어떤 해석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돌쇠 민족주의자로 오해를 살까봐 해두는 얘기지만, 사무라이 서사라서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따지고보면 구로자와 아키라도 사무라이 서사에 셰익스피어적 주제를 버무려 일가를 이룬 것 아닌가.

자국의 서사 전통에 충실한 작품을 지금도 다양한 장르로 재생산해내는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분명 부러운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인랑〉이 철학적 깊이를 획득한 놀라운 애니메이션이라는 과잉해석에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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