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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잉복지로 저성장 맴도는 일본 따라가지 말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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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06면

권철 프리랜서

일본의 세계적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69·사진)는 1999년 “한국은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글을 발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7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고도 했다. 그의 요즘 생각은 어떨까. 아울러 한국에도 일본처럼 고령화와 저성장·장기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이때, 양국을 위한 제언은 무엇일지도 궁금했다. 서면·전화 인터뷰를 요청한 지 여러 달 만에 “기자와 얼굴을 맞대는 인터뷰만 하겠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한국 언론과는 2년여 만의 첫 인터뷰다. 지난 8일 일본 일왕 거처인 고쿄(皇居)와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자리한 도쿄 중심가 지요다구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세계적 경제·경영 석학 오마에 겐이치 인터뷰

고색창연한 갈색 벽 2층 건물에 들어서자 1층 로비 벽에 ‘비즈니스 브레이크스루(Business Breakthrough)’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마에 겐이치가 설립해 학장을 맡고 있는 경영대학원 겸 경영콘텐트 제공업체의 이름이다. 사업의 돌파구나 경영해법 정도의 뜻이다. 인터뷰는 2층 그의 사무실 옆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한국을 200차례 이상 찾은 지한파답게 많은 상패 속에는 고려대 방문교수, 이화여대 명예 석학교수 위촉장이 눈에 띄었다. 회색 줄무늬 양복에 노타이 차림으로 나타난 그의 첫인상은 나이보다 젊고 활기차 보였다. 2시간 반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요즘 주로 하는 일과 관심사는.
“비즈니스 브레이크스루에서 6000시간 분량의 강의·영상 콘텐트를 만들었다. 삼성 기업지배구조 등 한국 기업의 이슈도 수업 주제다. 전 세계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공부할 수 있는 모바일 강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한국 경제는 어떻게 보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찬사를 보내고 삼성전자 등 많은 대기업이 잘나가고 있다. 하지만 저성장 우려도 크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내가 한국 경제의 더딘 구조조정을 비판한 99년 이후 13년간 큰 진보를 이뤘다.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이 탄생했고, 해외 유학 후 영어와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우수 인재가 넘친다. 하지만 한 계단 더 비약하려면 과제가 많다. 먼저 탄탄한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 현재 한국의 중소기업은 매력이 없다. 대기업의 하청업체일 뿐이다. 이러다 보니 한국 인재들은 대기업 취직이나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이 되면서 해외 인재 채용 비율을 늘리고 한국 내 채용은 줄이고 있다. 한국의 젊은 인재들이 취업난을 겪는 이유다. 국가 차원에서 청년창업 육성책을 통해 참신한 벤처기업을 많이 탄생시켜야 한다. 이렇게 좋은 인재가 많은데 한국에 ‘아시아의 실리콘밸리’ 같은 걸 만들 생각을 왜 못 하나. 대기업이 대학과 손잡고 청년창업을 적극 지원하면 대기업에 대한 국민 이
미지도 개선될 것이다.”

-중소·벤처기업 육성도 좋지만 지금은 대기업도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기업들이 지속성장을 하려면 거버넌스(Governanceㆍ통치력)를 확립해야 한다. 삼성ㆍ현대자동차ㆍ포스코 다 마찬가지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삼성을 보자. 그룹 매출 비중의 7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투자자가 5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들이 지분만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을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회장 이후의 삼성이다. 실적이 심상찮으면 외국인투자자들은 곧바로 경영권 교체 등을 요구할 수 있다. 대주주의 지분율을 높이면 좋겠지만 돈이 많이 든다. 그게 쉽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계열 분리를 할 수도 있다. 일본도 초창기에는 5대 재벌이 이끌었지만 지금은 다들 분화해 기업별 경쟁력과 일본 산업을 키웠다.”

-한국은 12월 대선이 있다. 정치권 과제는.
“훌륭한 지도자상이 절실하다. 한국 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을 높이 평가한다. 김 전 대통령은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한국을 외환위기에서 구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없었을지 모른다. 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높였다. 미국과의 동반자적 관계를 만든 점 등은 인정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그런 역할을 했다. 물론 이 대통령이 ‘747공약’ 등의 실패나 소통 부재 등으로 한국 내 지지율이 낮은 건 알고 있다. 한국의 대선 주자들이 현 대통령을 깎아내리고 국민에게 인기영합을 하려 한다면 국가적 불행이다. 국민에게 아부하고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는 정치인은 지금 일본에 많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수입해 가라.”

-일본 얘기를 해 보자. 저성장의 늪이 깊다. ‘잃어버린 10년(일본식 장기 경제 침체)’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면 90년대 초에 시작해 ‘잃어버린 20년’이다. 일본이 장기 불황에 빠진 건 정치 실패가 한몫했다. 90년대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은행 부실자산이 커졌을 때 과감하게 개혁하지 못했다.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을 끌어와 거의 한약 먹이는 수준으로 근근이 약발만 유지했다. 결국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정치적으로는 96년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대표와 연립했던 호소카와 정권 때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꾼 것이 보디블로(Body blow·결정타)였다. 그때부터 일본 정치인들의 배포가 작아졌다. 예를 들어 요코하마는 시장 한 명에 국회의원 8명이다. 이 때문에 넓은 시각을 갖고 나라 전체와 글로벌 경제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줄었다. 대개 지하철역에서 확성기 들고 아주머니들 환심 사는 ‘확성기 정치’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국민이 정치를 바꿀 수는 없나.
“국민이 이런 정치권의 잘못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은 불만은커녕 성공에 대한 욕심도 적다. 현재 상태에 그저 만족한다. 아예 욕심을 버리고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잇는 젊은이도 상당수다. 고령층은 주요 선진국 중 돈이 가장 많다. 일본인은 죽을 때 갖고 있는 1인당 총자산이 평균 3500만 엔(약 5억원)에 달한다. 이 돈을 소비하거나 투자하면 경제활력에 도움이 될 텐데, 그냥 갖고 있기 때문에 저성장 흐름을 깨기가 힘들다.”

-일본은 세계 3대 경제대국이다. 위기를 여러 번 극복한 저력이 있지 않나.
“물론 그렇다. 하지만 저성장 흐름을 바꾸려면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글로벌 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일이다. 현시점에서 일본 경제에 희망을 주는 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부품ㆍ소재기업들이다. 전 세계 웬만한 기계나 전자제품에는 일본이 만든 부품이 들어간다. 타이어 생산업체인 브리지스톤, 건설장비업체인 고마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일본 경제의 성장을 주도할 수 있다.”

-7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그 당시 삼성전자가 소니의 실적을 앞질렀을 때다. 삼성이 더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또 그때는 삼성 등 한국 대기업들의 실적이나 미래 비전이 지금보다 뚜렷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2세 경영자로서 열심히 해 큰 성과를 이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는 건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건 한국이 일본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만의 강점을 살려서 저성장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란 말인가.
“일본은 과도한 복지가 저성장을 낳았다. 그런 측면에서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서 복지 논쟁이 벌어지는 건 안타깝다. 한국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할 때다. 복지를 간판 정책으로 선택해 성공한 정부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복지는 마약과도 같다. 한 번 맛보면 헤어나기 어렵다. 일본은 엄청난 국가 부채를 지고 있지만 국민은 구급차를 택시처럼 부르고 매우 싼값에 의료보험을 이용한다. 이제 일본은 결과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지경이다. 운동회 때 10명이 달리기를 하면 순위가 갈리게 마련인데, 일본 사람들은 골인지점 앞에서 멈춰서 기다리다가 다같이 손잡고 들어간다. 한국은 그러지 않길 바란다.”

-한국의 강점을 꼽는다면.
“젊은 인재들이 뛰어나다. 저출산ㆍ고령화 때문에 성장이 어려울 거라는 우려는 어떤 점에선 틀렸다. 21세기는 인구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한국 인구가 일본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해외 유학을 하고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이들을 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월등하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큰 감명을 받고 있다. 한국 대기업과 정부는 이들이 창업해 자기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

-소니ㆍ파나소닉 등 일본 간판 대기업들의 퇴조가 두드러진다.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 등 잘나가는 한국 대기업과 대비된다.
“일본과 한국은 저변이 다르다. 일본에는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100개가 넘는다. 삼성전자가 소니ㆍ파나소닉을 이기고 글로벌 IT 정상기업이 된 건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볼 일이 아니다. 기업 세계의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다. 소니도 과거 미국 기업을 이기고 정상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 기업 중 상당수는 차이완(중국+대만) 기업들의 맹추격에 쫓기고 있지 않나. 일본 기업들은 요즘 일본 내에서보다는 해외에 거점을 두고 수익을 내고 있다. 과거 한국 대기업들이 일본 부품을 많이 사서 일본과의 무역불균형이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최근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줄어든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많은 일본 기업이 한국에 공장을 차리고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쉽게 한국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성장 극복의 구체적 아이디어는.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변신을 눈여겨보자. 젊은 나이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오사카 도(都) 구상’이 그것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관서지방을 묶어 경제특구로 지정한 뒤 도쿄에 이은 또 다른 수도로 만들자는 게 핵심 내용이다.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을 통해 도시와 지역경제를 살리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 하시모토 시장은 세금을 더 걷기보다 해외에서 기업과 투자자를 유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국민을 위해 바람직한 선택이다. 일본의 중앙정치는 관료적이고 아마추어 수준이어서 중앙에서 뭘 바꾸기보다 지방에서 이런 성공 스토리를 만드는 게 훨씬 빠르다. 오사카 도가 완성되면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전 세계 8위 수준의 경제 규모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나 제주특별자치도가 오사카와 비슷한 모델이다. 하지만 한국도 인천이나 제주도보다 훨씬 더 큰 차원의 지역발전 구상을 세울 필요가 있다.”



오마에 겐이치 1999년 7월 일본의 격주간 국제정보지 ‘사피오’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없는 이유’라는 자극적인 글을 게재했다. ‘한국 기업은 핵심 부품을 만들지 못하고, 한국 정부는 경제 회생 비전이 없어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후에도 한국 경제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과 비판적 분석을 꾸준히 내놓았다. 미국의 세계 대 경영컨설팅 업체 맥킨지에서 23년간 일하며 일본 지사장과 아시아ㆍ태평양 회장을 지냈다. 일찍이 94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피터 드러커, 톰피터스 등과 함께 오마에 겐이치를 세계 5대 경영구루(Guruㆍ권위자)로 꼽았다. 부의 위기 지식의 쇠퇴 등 100권 이상의 저술이 있고 최근작은 촌철살인 어록을 모아 3월에 출간한 난문쾌답이다. 와세다대 이공학부, 도쿄공업대 석사, 미 MIT원자력공학 박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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