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포 쓴 50명 여자들이 박찬호에 달려들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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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겨울밤 불암산 인근에 위치한 스튜디오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당시 업계 대표카드였던 국민카드 모델 박찬호 선수 광고촬영 현장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10년 넘게 광고를 만들어 왔지만 촬영장에 포토라인을 그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박찬호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고 2001년 LA다저스에서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힘들었던 시절 국민들에게 힘을 주었고 젊은이들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천문학적인 계약금을 받고 LA다저스에서 텍사스로 팀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는 화제의 주인공이자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광고촬영을 마친 다음날 주요 방송과 일간지, 스포츠지 1면 혹은 주요면은 박찬호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박선수에게 지불한 모델료를 훨씬 상회하는 홍보효과에 너무나 큰 성취감을 느꼈다. 면사포를 입은 50여명의 여자들이 결혼해 달라며 뛰어오는 장면과 박찬호 선수가 멋진 슈트를 입고 카드를 들어 보이며 “같이 쓰실래요”라고 말하는 광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2002년은 그야말로 카드광고 빅뱅이었다. 국민카드의 Korea First Card 국민카드(박찬호), 비씨카드의 여러분 부자되세요(김정은), 삼성카드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히딩크), LG카드의 이영애의 하루(이영애) 등 당대의 히트광고들이 격돌했고 향후 금융권 광고 활성화의 서막을 열었던 시기였다. 이 때의 경험은 훗날 김연아·박태환·이승기로 이어지는 KB광고 전성기를 여는 토대가 되었다.

얼마 전 TV에서 박찬호선수 부인이 정말 여자들이 결혼해달라고 달려왔었냐고 미심쩍게 질문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박선수는 당대 최고의 신랑감이기도 했으니까… LA에서 박찬호 선수를 촬영할 당시 면사포를 쓰고 달려왔던 수십 명의 20대 여자들은 교포, 일본, 동남아 출신의 현지 모델들이었으며, 메인 여자모델(서정민)만 한국에서부터 동행했다.

촬영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막내 조감독이었다. 제때 밥도 못먹고 무거운 장비 나르고, 길 위에 뒹굴며 촬영에 임하던 깊은 눈빛의 연출팀 막내… 몇 달 후 힘들어서 광고판을 떠난다는 소식만 남기고 훌쩍 떠난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몇 년 전 영화포스터에서였다. 박찬호 광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가…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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