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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스스로 괴물이 된 경기동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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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지하 운동권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어긴 역사는 깊다. 1984년 서울대 첫 총학생회장 선거 때 이야기다. 운동권 지도부는 대중성을 갖춘 법대의 이정우를 미리 점찍었다. 하지만 바람잡이로 사회학과 C군을 2번 후보로 내보내면서 사달이 났다. 예상을 깨고 들러리 후보가 선풍을 일으킨 것이다. 잘생긴 데다 말솜씨도 빼어난 치명적 매력(?)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 특히 여학생들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그의 사진을 떼가느라 선거 포스터마저 누더기가 될 정도였다. 결국 운동권 지도부는 변칙을 선택했다. 물밑에서 C군에게 더 이상 선거운동을 못하도록 압박했다. 투표 전날 ‘1번 지지’란 긴급 사발통문까지 돌린 뒤에야 가까스로 이겼다.

 이런 편법은 요즘 통합진보당의 경기동부연합에 비교하면 애교나 다름없다. 우선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백화점식 부정선거가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건 그 후의 반응이다. 비례대표는 당의 결정에 따르는 게 예의다. 그럼에도 지도부와 비례대표 사퇴를 권고한 당의 방침을 무시하고 ‘배 째라’는 식으로 버틴다. 진보당의 당권파인 경기동부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쓰는 표현과 몸짓부터 낯설다. 부정투표보다 그 사실을 공개한 것을 ‘배신’으로 몰아붙인다. “제일 위험한 건 동지로 위장해 세작(간첩)질을 일삼는 세력”이란 섬뜩한 경고까지 등장했다. 주체사상을 소개한 ‘미제(美帝)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강철 서신’이 어른거린다. 공산당처럼 당원증을 들어 찬반 표시를 하거나, 자기 정파의 입맛에 맞는 발언에 팔을 높이 들어 손뼉 치는 박수부대도 어색하기만 하다.

 경기동부가 왜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 것일까. 대부분 ‘정파적 이익’에 초점을 맞춘 고상한 분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한 인사는 “돈과 자리 때문”이라며 색다르게 해석했다. 운동권 중심세력은 20년 넘게 ‘투쟁’하면서 40대에 접어들었다. 민주노총만 봐도 위원장은 현장 출신이지만 사무국엔 학출(學出:노동현장으로 갔던 대학생)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생계형 주사파’가 많아진 것이다. 운동권이 대선·총선보다 지방선거에 더 눈독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조직원 5명을 데리고 가지만 구청장 한 명은 50명을 먹여 살린다”는 게 공공연한 이야기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경기동부는 아마 끝까지 버틸 게 분명하다. 자칫 당권을 놓게 되면 잃는 게 너무 많다. 매년 60억원에 이를 국고보조금 배분 권한이 다른 정파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 그동안 ‘투쟁경력’을 앞세워 운동권 광고를 독차지해온 돈줄이 말라붙을지 모른다. 곳곳에 포진한 생계형 주사파들이 대거 물갈이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공포 때문에 경기동부가 우리 사회의 합리성과 상식을 외면한 채 막가파처럼 어깃장을 놓는지 모른다.

 한 인터넷 매체 평론가는 경기동부를 “우리 안의 괴물”이라 지목했다. 군부독재라는 괴물과 싸우면서 스스로 괴물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경쟁 정파들이 패권주의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한때 같이 운동했던 사람끼리…”라는 온정주의가 경기동부의 고질병을 표면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옛 민노당 분당 때 우리 사회는 군소정당의 ‘집안싸움’으로 여겨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 진보당의 덩치가 커졌다. 인터넷을 통해 진보진영의 다툼도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 그들의 ‘생얼’을 처음 본 사람은 한결같이 충격 받은 표정이다. 예전처럼 ‘색깔론’ 방어막이 더 이상 먹혀들 분위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진보진영에도 엄격한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권력에 혈안이 된 ‘극좌파’란 딱지가 붙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다고 보수진영이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일은 아닌 듯싶다. 검찰 수사를 주문하기보다, 진보진영 수술은 그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 손에 맡기는 게 우선이다. 총선에서 10%의 지지를 얻은 객관적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정중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보당의 산통(産痛)을 가만히 지켜보았으면 싶다. 진보진영 생태계가 건강하게 거듭나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