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 그대로의 욕망,그 쓸쓸함으로 모두를 감전시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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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문제는 도발이었다. 영화 ‘은교’가 사람들을 잡아당긴 건 우선 도발의 이미지였다. 광고 카피부터가 관능적이었다. ‘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 서로를 탐닉하다’. 게다가 파격적인 정사 장면까지 예고됐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사람들은 ‘은교’의 도발적 이미지에 자극된 게 아니라 영화가 뿜어내는 쓸쓸한 에너지에 감전됐다.

사실 영화가 원작 소설이 품고 있는 존재론적 슬픔을 온전히 담아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이 욕망과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면, 영화는 그 입구쯤에서 서성인 듯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일까. 영상예술이 닿을 수 없었던 언어예술의 경지가 궁금했던 이들이 서점으로 몰려들었다. 원작인 박범신의 장편 『은교』는 영화 개봉과 더불어 베스트셀러 종합 2위에까지 올라섰다.

소설 『은교』(문학동네)는 2010년 4월 출간됐다. 출간 당시에도 화제가 됐다. 17세 여고생 한은교와 70세 노시인 이적요의 사랑은 사람들의 은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2년이 흘러 영화로 개봉되면서 소설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박범신은 “과거에는 소설이 영화를 끌고 갔는데, 영화에 이끌려 소설이 팔리는 세태가 반갑지만은 않다”고 에둘러 서운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마땅한 푸념이었다. 작가로서는 영화 ‘은교’가 소설 『은교』의 온전한 반영물로 비치는 게 불편했을 게다. 그래서 그는 “영화만 보고 소설 『은교』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라고 했다. 원작자로서 그는 영화 ‘은교’를 어떻게 봤을까. 지난달 18일 첫 번째 시사회가 끝난 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적었다. ‘순수하게 영화로서만 볼 수 없는 원작자의 입장이라 그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이입을 방해했다. 나는 불행한 관객이었다’.

두 번째 시사회(4월 23일)는 선후배 문인들과 함께였다. 그곳에서 만난 박범신은 “영화를 원작과 분리해 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시사회가 지난달 27일 그의 고향 논산에서 열렸다. 그날 그는 영화를 보며 세 번 울었다고 한다. ‘오늘 나는 내 원작을 잊고 영화를 보았다. 슬픔조차 잃어버린 시대의 전설처럼 슬픈 영화였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영화 ‘은교’는 100만 관객을 향해 순항 중이다. 소설 『은교』도 베스트셀러 1위를 탐할 기세다. 박범신은 “영화와 소설을 분리해 보라”고 했지만, 저 둘을 이어주는 건 아무래도 원작에서 발산된 욕망의 에너지다. 10대의 욕망(한은교)과 30대의 욕망(서지우), 70대의 욕망(이적요)이 서로를 탐닉하고,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집어삼키고 마는 욕망의 서사.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결핍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은교의 대사처럼 사람들은 “외로워서” 박범신의 『은교』로 몰려드는 걸까. ‘은교’가 상영되는 극장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소설 『은교』를 읽는 밤도 그러했을 테다. 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감전되는 중이다.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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