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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영합하는 감독 그런 선입견이 깨졌다 .'이 사람, 정말 괜찮다’ 싶어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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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16면

원고에 치이고, 편집 마감에 치이고, 사람에게 치이다가도 편집자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 『대니 보일』을 만들 때가 그랬다. 처음엔 ‘영화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것도 이미 지난 이야기―이 책에 실린 인터뷰는 모두 과거의 일이므로―를 영화가 아닌 활자로 접하면서 회의적인 마음이 많이 들었다. 예술가는 작품이 전부라는 생각이 앞서서다.

숨은 책 찾기 <3> 『대니 보일』

그런데 원고는 영화나 음악과 달라서 가만두면 서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집중해 페이지를 다 읽어내기 전에는 제멋대로 다음 장으로 나아가는 법이 없다. 이 점이 편집자라는 직업에 감사한 이유인데, 마지못해서나마 원고를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앞서 예술가 운운한 그 고집스러운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니 보일은 기본적으로 영화로 말하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 정말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인간으로서도, 감독으로서도 모범적인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이었다. 영화가 종합예술이자 협동예술임을 아는 그는 타고난 예술가를 자처하는 이들 안에 숨은 덫, 그러니까 고집과 독선과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자의식을 철저히 거부한다. 전문 각본가 및 촬영감독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여러 차례 손발을 맞추면서 팀을 조율해 나간다. 그는 천성적으로 완성형 감독이라기보다는 진행형 감독이다.

그래서일까. 혼자서 각본도 쓰고 각색도 하고 편집도 하는 요즘의 웬만한 팔방미인 감독들과 달리 그는 자기 각본 하나 없다. 물론 이 점이 껄끄러울 일은 없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한테 촬영을 맡기고 각본을 맡기는 일, 결과물을 위해서라면 감독의 자의식이나 욕심 따위는 어렵지 않게 접어두는 일,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게 자기 본분임을 대니 보일은 잘 안다. 즉 그만의 방식으로 그는 진정 작가인 셈이다.

영화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을 그의 이면과 실무를 독자에 앞서 먼저 누릴 수 있는 건 편집자이기에 얻는 행운이다. ‘쉘로우 그레이브’부터 ‘트레인스포팅’ ‘인질’ ‘비치’ ‘28일 후’ ‘밀리언즈’ ‘선샤인’ ‘슬럼독 밀리어네어’ 그리고 ‘127시간’까지 대니 보일의 영화를 빠짐없이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이 감독이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기에, 이 감독이 관객과 영합하기에, 이 감독이 영화적 테크놀로지를 숭상하기에 ‘이 감독, 믿고 봐도 괜찮을까’ 하던 그간의 의문스러움은 책을 보는 동안 그의 영화를 다시금 음미하며 더없이 굳은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분명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지만 ‘28일 후’처럼 장르 영화의 형식을 빌려 인간의 심연을 깊이 통찰할 줄 아는 속 깊은 감독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말하는 것처럼 “자동차 충돌 사고” 같은 볼거리를 마련해 애써 커다란 영화관을 찾은 관객에게 보상할 줄 아는 감독이다. 어디 그뿐인가. 정통성을 추구한다며 값비싼 필름에 스스로를 얽어매기보다는 저렴한 비용에 찍고 지우기도 편한 디지털 카메라로 다양한 영화 실험을 즐길 줄 아는 감독이다.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술적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구구절절하고 어쩌면 잡스럽기까지 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쉽게 들을 수도 없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기에 더없이 귀한 대니 보일의 목소리가 이 책에 담겼다. 영화감독의 작품이 아니라 인터뷰를 읽는 일은 다소 생경할 수 있지만, 좀처럼 자신을 영화보다 앞세우는 일이 없는 감독이기에 뜻밖의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재미를 느낀 최초의 독자가 나니까.

올해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익히 알려졌던 대로 대니 보일이 총지휘한다. 정통성과 체면을 중시하는 나라, 그래서 반문화가 더욱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라는 점을 생각하니 영국을 그리는 데 대니 보일만 한 사람도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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